[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신약의 등장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신약의 등장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3.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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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의학의 연구와 실제 응용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영국의 런던 왕립학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획기적인 발견도 프랑스로 넘어가면 미미한 영향에 그치고 만다. 각종 학회에 소속된 학자들은 새로운 의학의 발전 방향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환자들에게 주는 처방전은 여전히 관장, 사혈요법, 설사 등 수세기 전부터 전해내려 오던 고리타분한 방식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처럼 부작용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없었다. 17세기에는 두 가지 신약이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안티몬과 키니네였다.

안티몬(Antimony: Sb, 백색의 광택 나는 금속 원소로 활자 합금, 도금, 반도체 따위의 재료로 쓰임)은 15세기 유럽의 연금술사들에 의해 발견되어 당시에는 늑대 모양의 부호로 표시했다. 광석을 굽는 과정에서 금속 형태로 분해되어 나왔는데 얼핏 보기에는 아연과 비슷해 초기에는 아연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17세기에 안티몬의 성질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안티몬의 승리》라는 책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안티몬의 특징은 열을 받으면 수축하고 냉각될 때 팽창하는 것이었다. 외관상 은백색의 광택을 띠고 있으며 녹는 점과 끓는 점에 큰 차이가 없다. 아연보다는 약 2배 정도 무겁지만 떨어뜨리면 쉽게 부서지는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상(砒霜)에 버금가는 독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티몬을 먹은 돼지가 살이 더 통통하게 오른 것을 발견한 한 학자가 이를 영양실조에 걸린 수도사에게 먹인 적이 있었는데 그 수도사는 그만 죽어버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1세기가 지난 후에야 안티몬이 양약인가, 독약인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파리 대학 의대 총장이었던 바딘 교수는 안티몬을 약으로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그는 안티몬이 약으로 사용되면서 30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는 융통성이 결여된 고지식한 인물로 언제나 권위를 상징하는 긴 가운을 걸치고 나타났으며 오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연구실에 가둬두고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저술을 달달 외도록 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바딘은 17세기 중엽 파리 교수단을 대표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치료방법은 매우 고루했다. 우선 사혈요법을 실시해 피를 철철 흘리게 한 뒤 설사약을 잔뜩 복용하게 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실시했던 치료방법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가슴에 피가 고여 열두 차례나 사혈요법을 받았고 아들도 감기 치료를 위해 열두 차례나 사혈요법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체내의 나쁜 체액을 억제하고 간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에야 사혈요법이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티몬’을 둘러싼 논쟁에서 바딘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1658년 젊은 황제 루이 14세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졌다. 장티푸스라는 초기 진단이 내려졌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결국 예전에 루이 14세의 성병을 고친 적이 있었던 비요(Villot)라는 의사가 왕궁으로 불려오게 되었다. 비요는 루이 14세에게 안티몬을 처방했고 그는 곧 건강을 되찾았다. 과연 안티몬이 약효를 발휘한 것인지 증명할 바는 없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은 안티몬을 만병 통치약으로 여기게 되었다.

비록 안티몬의 논쟁에서는 패했지만 바딘도 의학사에서 공헌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파리의 약제사들이 불필요한 약제까지 처방해 병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를 비판했다. 그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처방에 사용하는 약을 60가지 이하로 줄였으며 게 눈, 위석 등 약효가 증명되지 않는 약은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약 처방에 지렁이, 여우의 허파, 늑대의 기름 등 점술학적인 요소가 포함되었다.

1635년, 알로에, 설사약, 자황(雌黃), 아니스(anise, 향료로 사용되는 산형과의 한해살이 풀) 등을 섞은 ‘스코틀랜드 약’이 처음 선보였는데 1875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드넘도 생사를 재가공하여 환약을 만들었는데 찰리 2세가 5,000파운드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는 얘기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약품들은 질병 치료에 기본적으로 쓰였으나 가격이 대체로 비쌌다. 1633년에는 환약 하나에 1.5파운드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사와 약사는 언제나 다소 긴장된 관계를 맺어왔다. 당시 의사들의 눈에 약사는 ‘독약 제조자’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지위는 굴뚝청소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서 약제사들의 지위는 나날이 높아졌다. 페스트가 전 유럽을 강타했을 때 수많은 의사들은 도망가기 바빴지만 약제사들은 그들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화학, 실험과학 분야에서 신약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의사들도 점점 약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갔다.

약사들은 의사들과 달리 오랜 기간 환자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노하우가 축적되었고 무료로 유익한 처방을 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약사들이 의사보다도 오히려 병을 더 잘 파악한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약사들의 수입이 의사보다도 많아지게 되면서부터 자연히 의사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약사들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들이 처방하는 약값도 함께 높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약사들은 강도나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왕립의학회가 환약 한 알과 탕약 한 제에 6파운드나 받은 약사를 고소한 적도 있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1618년 왕립의학협회로 하여금 런던의 약사들을 감시 감독케 하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의학회는 합법적으로 런던의 약사, 약방, 부당한 의료행위 등을 감시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이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약사의 청구서가 환자와 의사간의 분쟁으로 번졌으며 과도한 약값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696년 왕립의학협회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저가 약국을 개업하게 되었다.

17세기 말, 당시 중국의 강희제가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준 약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의 스승 조인(曹寅, 《홍루몽》을 지은 조설근의 조부)이 양저우(楊州)에서 공무를 집행하던 중에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약을 보내 그를 살렸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말라리아에 특효를 보인 약이 바로 키니네이다. 키니네는 페루 총독 친천(Chinchon) 백작의 부인이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현지 인디언들이 키나나무 껍질을 가지고 와서 그녀를 살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천주교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오랜 기간 찾아 헤맨 결과 남미 페루의 안데스 산에서 이 키나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e)가 친천 백작의 이름으로 이 나무의 이름을 명명했다.

페루에서 발견된 이 신기한 약은 곧 유럽시장에도 등장했다. 말라리아에 특효를 보인 이 약의 등장으로 시드넘의 의술마저도 그 빛이 바랜 듯했다. 당시 루고(Cardinalde Lugo)라는 거상의 지원 아래 천주교 선교사들이 이 약을 전 세계에 보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교를 믿는 국가들은 “천주교의 나무껍질 따위는 먹지 않겠다.”라며 이 약을 거부했다. 영국 의회파의 영수 크롬웰도 말라리아에 감염되었으나 끝내 이 약을 거부해 사망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키니네의 수요가 점점 증가하자 네덜란드인들은 키나나무를 그들의 식민지였던 자바 섬에 옮겨 심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쳐 페루에 식물학자를 보내 키나나무 묘목을 훔쳐온 결과 1854년에 키나나무 500여 그루를 자바 섬에서 재배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살아남은 열여섯 그루의 키나나무는 향후 인도네시아를 키나 왕국으로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는 키나의 최대 수출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키나는 전 세계를 변화시킨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는 중국의 《본초강목》과 같은 약초와 관련된 저술이 많지 않았다. 키나의 발견은 갈레노스 학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으며 약리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820년에 이르러 프랑스의 화학자 피에르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조셉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가 키나에서 키니네와 신코닌(Cinchonine, 키나에서 추출된 알칼로이드)을 분해하는데 성공했다. 1880년에는 프랑스의 외과의사 알폰스 라브랑(Alphonse Laveran)이 현미경으로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의 혈액을 관찰해 말라리아 원충을 발견했으며 1944년 하버드 대학의 과학자 로버트 언더우드(Robert Underwood)와 윌리엄 되링(William Doering)이 처음으로 키니네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화학, 약학, 병리학적인 진보를 거쳐 키니네는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현대 의약품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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