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비엔나 시 중심엔 한 줄기 갈색 연기 같이 기이한 모양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의 인물상들이 그 기둥을 둘러싸고 있고 기둥 아래에는 왕이 왕관을 손에 들고 꿇어 앉아 있다. 이 기둥이 바로 페스트 기념비(Pestaule)이다. 17세기, 전 유럽을 휩쓴 페스트로 수많은 도시가 텅 빈 폐허로 변했으며 권력도 부도 죽음의 문턱에 선 병자들을 살릴 수 없었다. 전례 없는 무서운 재앙은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갔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왕마저도 죽음으로 내몰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왕좌를 걸고 하늘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17세기는 유행병, 전쟁, 기아 등 3대 재앙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30년 전쟁이 불러온 전염병은 유럽을 처참하게 유린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정복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살육해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전염병과 기아로 황폐화된 아일랜드에서는 몇 리를 걸어도 사람, 아니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나기 어려웠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영-프간의 전면전이 벌어지자 이틈을 타고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유럽으로 진군했다. 종교혁명으로 칼뱅파와 루터파 신도들은 도처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다. 터키 귀족들의 내분이 나날이 격화되었으며 러시아는 폴란드의 손에서 우크라이나를 빼앗았다. 프랑스 리옹의 인구 절반이 목숨을 잃었고 이탈리아 밀라노는 8만 6천 명, 베니스는 50만 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1601~1603년에 만연한 페스트로 모스크바에서 12만 7천 명이 죽었으며 1603~1613년까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도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625년 네덜란드는 페스트로 7천 명이 사망했다.

발진티푸스, 이질, 천연두 등의 전염병도 함께 발생했으며 천연두는 미국 식민지 대서양 연안까지 만연했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이미 기존에 두 차례 발생했던 전염병의 참상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공포가 다시 닥치자 의사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무너졌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는 《역병의 해 일지 Journal of the Plague Year》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염병에 대항할 수 있는 약은 아무것도 없었다.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은 모두 의사들이 움켜쥐고 있었다.”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기에 ‘인구통계학’이란 새로운 영역의 학문이 등장했다. 1662년 영국의 존 그라운트(John Graunt)는 런던에서 《사망보고서에 관한 자연 및 정치적 소견 Natural and Political Observation Made upon the Bill of Mortality》이란 최초의 인구통계 보고서를 출판했다.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안 혹시 장기간 가족들과 떨어져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망을 조작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므로 이 보고서에 나와 있는 수치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사망률의 통계를 바탕으로 남아의 출생률이 여아의 출생률보다 높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1665년 페스트가 잉글랜드를 엄습하자 런던은 순식간에 거대한 시체 안치실로 변하고 말았다. 살아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까지 한데 몰아넣은 격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도처에 드리워져 있었다. 가족 중에 한 사람만 감염되어도 가족 전체가 집안에 연금 상태로 격리되었다. 열쇠 구멍까지 꼼꼼히 틀어막고 군사들로 겹겹이 포위해 전염을 막으려 했지만 감염자가 워낙 많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격리정책은 도시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페스트를 옮기는 범인은 쥐의 몸에 기생하는 벼룩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전염시킨다고 생각했으므로 정부는 인력을 고용해 닥치는 대로 개와 고양이를 도살했다. 거리마다 공기를 정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런 효과도 없는 구시대적 방법으로 무력하게 전염병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런던 시의원이 왕립의학협회에 해결 방안을 촉구했다. 의학협회는 4개 도시의 의사를 고용해 페스트에 걸린 빈곤층을 돌보게 하는 방안을 냈지만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사망한 환자의 의복은 바로 폐기하고 환자들은 4시간마다 깨우도록 했다. 한 번 자면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페스트에 대항하는 특수 액체를 만들어 약사들에게 주며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대규모로 유행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1년 후 런던 시민 가운데 6만 8,956명이 사망했다. 이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이므로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적은 있게 마련이었다. 라벤더가 많이 생산되었던 한 작은 마을은 신기하게도 전염병을 피해갈 수 있었다.

17세기에 발생한 페스트는 런던을 비롯해 수많은 도시로 번졌으며 이는 바다 건너 북미에까지 전염되었다.

1607년 북미 대륙 개척의 꿈을 안고 버지니아 호에 올랐던 사람들은 최초의 정착지에 ‘제임스타운’을 세웠다. 전염병은 바로 이 제임스타운을 기점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4년이 지날 무렵 제임스타운의 전체 인구 398명 가운데 380명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백인들에게 새로운 땅을 주기 위해 인디언들이 페스트의 저주를 받았다는 황당한 유언비어를 떠벌리는 사람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북미 개척자들이 이처럼 허무하게 죽어간 것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먼 땅으로 이주했건만 이곳엔 의사도 약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버지니아 호의 선장 존 스미스가 치료를 받으러 런던까지 온 일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라이덴, 런던의 유명의사들 중에 누가 감히 도시의 안락한 진료실을 버리고 황무지로 올 생각을 하겠는가?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한결같은 발전 모델처럼 이곳에서도 선교사들이 의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들은 환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코네티컷 주의 주지사 존 윈드로프(John Winthrop)처럼 예외적인 인물도 있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왕립학회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뛰어난 의사였다고 해도 의약품이 부족한 상태에서 몰려드는 환자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현지에서 나는 식물을 이용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선교사들처럼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데 그쳤다. 배가 아파서 찾아온 환자에게 보름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 버터를 바른 탄알을 먹도록 하거나 사자의 갈기로 왼쪽 팔뚝을 쓸어내려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미국의 개척시대는 수많은 전설을 탄생시켰다. 당시의 개척자들이 어떻게 지금의 강대한 미국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여성들은 여전히 출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권 운동가 앤 허친슨(Anne Hutchinson)은 당시 조산사였으며 독서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보스턴에 정착한 그녀는 열정과 끼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매주 두 번씩 자신의 거실에서 문학을 분석하고 신학에 대한 변론을 벌이는 등 토론을 개최했는데 남성 청교도들과 종종 충돌을 빚었다. 결국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고 사사로운 집회를 조직해 신에게 반항하고 여성의 본분을 저버렸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그녀는 대담하고 유창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잘못이 인정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행위는 당시 청교도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완성된 후엔 신이 직접 계시를 내리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앤 허친슨은 결국 추방되었고 인디언들에게 가족 모두와 함께 몰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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