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궁정의사 이야기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궁정의사 이야기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3.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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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영국과 프랑스에는 국왕의 손길이 환자에게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특히 ‘림프 결핵’에 특효가 있다고 해서 이 병을 ‘왕의 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치료방법은 환자들에게 강한 믿음을 부여하면서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국왕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위엄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믿음치료’는 말 그대로 믿음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환자의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단정했다. 국왕에게 실패는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찰리 2세(1660~1685재위)는 퇴위할 때까지 매년 1회 ‘기적’의 시료를 베풀어 10만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환자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병이 낫기를 기원한 후 은화 한 닢씩을 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이 은화 한 닢을 받기 위해 가짜 환자 행세를 하며 런던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후에 궁정의사들이 진짜 환자를 구별한 후에 왕궁으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1684년, 한 귀족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진료가 시작될 때마다 의사들 앞으로 예닐곱 명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윌리엄 3세(William III, 1689~1702 재위)는 이러한 믿음치료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매우 형식적으로 시료에 임했다.

각국의 왕실은 일반 백성과 다른 고귀한 신분이라는 특징 때문에 의학과 의사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들은 왕실의 궁정의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베살리우스, 파레, 하비 등도 모두 왕실의 궁정의사였다. 그들은 물론 뛰어난 의술과 훌륭한 저서로도 유명하지만 궁정의사라는 신분의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궁정의사란 바로 당대 최고의 의사임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루이 15세 때 수석 궁정의사였던 시라크는 뚜렷한 의학적 성과가 없는 인물이다. 다만 나름대로 복통을 고치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직접 특수 제작한 마차를 이용해 환자를 치유했다. 마차 좌석 중앙에 구멍이 나 있는데 환자가 맨 엉덩이로 여기에 앉은 채 3일 밤낮으로 마차를 달리게 하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당시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확실히 고증할 방법은 없다.

태양왕으로 불렸던 루이 14세는 의학을 매우 장려했던 왕이었다. 젊은 시절 천연두를 비롯해 괴저병, 성병 등으로 고생했던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시종을 두고 질병, 건강상태 등을 상세하게 기재하도록 했다. 《루이왕 일기》로 명명된 책은 당시의 질병과 치료방법을 고증하는 귀중한 자료에 해당한다. 루이 14세는 왕비 마리아가 출산하는 장면까지 직접 목도할 정도였으며 후에 출산을 담당한 조산사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매우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극도로 사치를 즐겼다. 말년에는 자주 폭식을 해서 소화기 질병에 걸렸는데 의사가 바로 증상을 치유하지 못하면 심한 질책을 가했다. 따라서 궁정의사가 비록 영예로운 신분이긴 했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랐다. ‘왕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중국 속담이 딱 들어맞는 말일 것 같다.

1685년 루이 14세의 직장에 작은 치루가 생겼는데 궁정의사들이 손을 쓸 방법이 없었으므로 궁 밖에서 프랑수와라는 외과의사를 불러와 진찰토록 했다. 당시 상황이 파레를 불렀을 때보다 더 긴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프랑수와는 바로 수술을 하지 않고 대신 루이 14세에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므로 수술의 효과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수술시기를 6개월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사실 프랑수와는 이 6개월 동안 루이 14세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내 이들을 대상으로 수술 실습을 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그의 수술 칼 아래서 목숨을 잃었으며 그는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밤에 몰래 죽은 환자들을 매장했다.

1686년 11월 18일 드디어 프랑수와는 왕궁에서 루이 14세의 수술을 집도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그는 바로 귀족 신분에 올랐으며 수석 궁정의사의 3년 봉록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다. 아울러 프랑스 최고의 외과의사라는 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루이 14세가 회복되는 동안 엉덩이에 붕대를 감고 궁전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아마도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종의 쇼가 아니었을까?

당시 프랑스 의학계는 파리 대학 바딘 총장의 영향으로 매우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유명 극작가였던 몰리에르(Moliere, 1622~1673)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갈레노스파의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가 병이 더 악화되었다. 이에 자신의 연극에서 의사들을 풍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메드빌런이란 의사 친구가 있었다.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에게 어떻게 하면 메드빌런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몰리에르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저는 그가 처방해준 약을 절대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것이지요.”그의 가장 유명한 연극 《상상병 환자 Le Malade imaginaire》 3회 공연이 끝났을 때 그는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폐렴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계속했다. 1673년 2월 17일 그가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쓰러졌는데 집에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각혈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당시 관례였던 병자성사(病者聖事, 죽음에 임박한 신자가 받는 성사)도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으론 그가 무대에서 죽는 연기를 하면서 바로 숨을 거두었다는 설도 있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황제 가운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의 소유자로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북유럽 지역을 여행할 때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해부학자 레벤후크와 프레데릭 루이시(Frederik Ruysch)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특히 루이시의 인체 골격 모델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 모델은 손에 뼈로 만든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으며 줄을 켜는 활은 색을 입힌 혈관모양을 하고 있었으므로 예술적 감각이 농후했다.

표트르 대제가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어린 아이의 미라였다. 그는 약 3만 루블(미화 10만 달러 상당)을 지불하고 이 미라를 구입했다. 그는 남은 여정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선원들에게 미라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놓도록 했다. 그러나 미라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선원들은 보관용 알코올에만 관심을 두었다. 결국 미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일부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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