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느림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느림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04.08 09: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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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24X24cm, water color, 2014, 신의숙
길을 가다, 24X24cm, water color, 2014, 신의숙

느림


느린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눈곱만한 씨앗이 
연초록의 가늘은 줄기를 올리는 것을,
머리카락이 머리를 덮고
문지방에 선 아이들의 키가 자라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느려서 그 느림의 속도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봄날 며칠,
세상을 푸르게 일으키는
풀들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가 늙는 것도 
너무 느림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백 년 천 년, 
느림의 힘.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 느림이
보이지도 않는 느림의 빠름으로 
나를 바꾸고 당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어느 날
빠름보다 더 빠르게
느림은 우리의 눈앞에 닥칩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에 살면서 텃밭을 가꾸어 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김을 매는데, 김이라는 잡초를 바라보면 그 생명력은 정말 가공할 만합니다. 오죽하면 농사를 지울 때, 김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함께 하라는 말이 생겼겠는지요. 김을 매다보면 짜증이 앞서기도 하지만 잡초의 생명력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경이와 찬탄이 절로 나옵니다.

잡초들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하루 이틀이면 다시 자라 있습니다. 꼭 그 잡초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것 같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좀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잡초는 절대 가속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속도를 유지하면서 밭이나 들녘을 푸르게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잡초는 우공이산愚公移山입니다.

저렇게 잡초처럼 산다면 못할 일도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 몰두해서 천천히 걷는다면 도달하지 못할 곳도 없을 겁니다.

절대 느림의 속도로 돌진해 오는 녹음이나 개화開花로 해서 그냥 있을 것 같은 겨울은 봄이 되고 여름이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방심放心한 사이 우리가 놀랄 정도로 느림은 세상도 변하게 하고 우리도 변하게 합니다. 어쩌면 느림의 속도는 방심의 속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그 느림이/보이지도 않는 느림의 빠름으로/나를 바꾸고 당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어느 날/빠름보다 더 빠르게/느림은 우리의 눈앞에 닥칩니다.’

느림의 속도가 가장 빠른 속도입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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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국 2019-04-13 16:53:01
느림이 어느새 빨라짐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늙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에 떨어지는 낙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