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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그는 폐렴을 자주 앓았는데, 영국 총리를 지내던 1943년에는 한 해 동안 두 번이나 심한 폐렴에 걸렸다. 이때 처칠의 병을 치료한 약이 있다. 바로 설파제의 일종인 설파피리딘이다.

설파제는 1970년대까지 효과적인 항균제로 널리 처방됐다. 설파제를 처음 개발한 이는 독일의 생화학자 게르하르트 도마크다. 브란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킬 대학에 입학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한 학기만 끝낸 채 야전병원의 위생병으로 입대해야 했다.

 

야전에서 무려 4년6개월 동안 의무병으로 근무한 그는 한 가지 목표를 세우게 된다. 군인들이 상처 감염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고는 감염성 질환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복학한 그는 1921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킬 시립병원과 그라이프스발트대학 병리학과 등을 거쳐 뮌스터대학 병리학 전임강사가 된 그에게 어느 날 바이엘 제약회사의 연구소장이 만나자고 요청해왔다. 세포병리작용에 관한 도마크의 논문을 우연히 읽고 연구소의 병리학과 세균학 실험실의 책임자로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뮌스터대학의 교수직도 함께 갖는 것을 조건으로 제의에 응한 도마크는 이때부터 세균을 무력화시키는 화학요법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이엘 연구소에서 합성한 염료인 아조 화합물이었다. 세균의 세포벽에 잘 달라붙는 염료일수록 세균을 잘 죽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연구 보조를 맡은 화학자 프리츠 미츠슈와 요제프 클라러와 함께 수백 개의 화합물을 연구한 끝에 1932년 크리스마스날 마침내 빨간색의 프론토실이라는 염료가 항균력이 매우 우수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연쇄상구균을 주입한 실험용 쥐들에게 프론토실을 주사한 결과, 실제로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됐다. 프론토실의 장점은 동물에게 대량으로 투여해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뿐더러, 시험관 속의 세균은 죽이지 못하는 대신 생체 내에서만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체에서는 어떤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마침 도마크의 딸이 바늘에 찔린 후 감염되어 패혈증에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죽어가는 딸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도마크는 프론토실을 딸에게 주사했고, 그 후 딸이 놀라운 회복 증세를 보이면서 이 새로운 항균제가 사람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1935년 2월 프론토실에 대한 도마크의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파스퇴르연구소의 다니엘 보베트는 프론토실이 생체에 들어갔을 때 생성되는 설파닐아미드가 항균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후 설파닐아미드를 합성한 항균제 개발 경쟁에 불이 붙었고, 그렇게 개발된 약을 통칭한 것이 바로 설파제다.

처칠을 위험에서 구한 약인 설파피리딘도 그런 약 중의 하나다. 비록 도마크가 직접 개발한 약은 아니지만, 독일의 생화학자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된 약이 적국이었던 영국 총리이자 전쟁 영웅 처칠을 구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건 도마크가 프론토실을 발견하기 4년 전인 1928년이었지만, 페니실린의 효과가 완전히 증명된 건 그로부터 12년 후인 1940년이다. 이처럼 효능 입증이 늦어진 데는 플레밍과 도마크의 기막힌 인연도 한몫했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로부터 얻은 페니실린이 연쇄상구균과 디프테리아균 등에 항균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인체를 대상으로 여러 번 실험을 해봤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어 고민에 빠졌다.

바로 그 무렵 플레밍은 영국왕립협회에서 도마크의 프론토실 관련 강연을 듣고는 페니실린 연구를 완전히 포기해버린다. 실험실에서도 그처럼 우수한 항균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데, 앞으로 페니실린 연구를 더해봤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플레밍보다 발견이 늦었던 도마크가 먼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39년 10월 26일 밤 도마크는 직접 노벨상위원회로부터 그해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도마크는 그로부터 10여 일 후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마을 유치장에 감금됐다.

체포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그는 일주일 후 석방되자마자 노벨상 수상을 거절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히틀러의 명령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치의 집권을 반대한 독일의 언론인 폰 오시체츠키에게 1935년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자 그 후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에게 노벨상이 수여되더라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페니실린의 효능을 밝히지 못한 플레밍은 1945년에 결국 독일 출신의 영국인 언스트 체인 및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워드 플로리와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체인과 플로리가 엉성했던 플레밍의 연구 방법을 보완해 1940년에 동물실험을 한 결과, 도마크의 프론토실처럼 페니실린의 놀라운 효과를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강요에 의해 노벨상을 받지 못했던 도마크는 8년 후인 1947년 12월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해 상장과 메달만 수여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상금을 받지 못한 이유는 1년 내에 찾아가지 않으면 환수한다는 노벨상의 수상 규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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