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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총 4명이다. 프랑스의 마리 퀴리가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의 물리학자 존 바딘은 물리학상을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 또한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도 화학상을 두 번 수상했다.

나머지 한 명은 바로 미국의 천재 과학자 라이너스 폴링이다. 그는 1954년 화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62년에는 평화상을 수상했다. 과학과 다른 분야에서 두 번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며, 두 차례 모두 단독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9세 때 다윈의 저서를 읽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명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화학 실험에 관심이 많아 대학 진학 후에는 매일 밤늦게까지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화학 및 수학 관련 과목에서 모두 A학점을 받으며 오리건주립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25세 때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X선 회절로 광물의 결정구조를 연구해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소 물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후 양자물리학 연구의 중심지였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닐스 보어(1922년 노벨 물리학상),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같은 대가들 밑에서 꿈을 키웠다.

폴링은 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30세에 랭뮤어상의 최초 수상자로 선정됐으며 같은 해에 칼텍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또 2년 후에는 미국과학원 70년 역사상 최연소 회원이 되었다.

폴링의 화학적 성과는 무엇보다 화학결합에 전기음성도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이 화학이론에 양자역학을 적용시켜 오비탈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이후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는 각 원자들이 모여 적절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해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모여 물질이 될 수 있는 원자의 가장 기본적인 결합 방법을 규명했다. 이 같은 업적으로 그는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단백질 구조를 규명함에 따라 ‘현대 의약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그의 평화상 수상은 반핵 및 반전 운동 덕분이다. 1940년대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던 오펜하이머가 화학 부문 책임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폴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에는 반핵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노벨 화학상 수상 다음해인 1955년에는 5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핵실험 금지 서명운동을 벌였다.

1958년에는 49개국 1만1000여 명의 과학자가 서명한 청원서를 폴링이 직접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그가 출간한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저서의 제목은 반전 시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구호가 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폴링의 이 같은 활동은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았다. 소련과 군비경쟁을 하던 때이니 반핵 및 반전 운동 자체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을 일으킨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었으며,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폴링을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폴링이 재직하던 칼텍에서는 그의 연구보조금을 끊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당시 ‘라이프’ 지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매체는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을 ‘노르웨이에서 온 해괴한 모욕’이라고 뽑았다.

이 같은 미국 정부의 탄압은 폴링이 평화상 때문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소문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폴링은 19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관련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 받았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 국무부가 반핵 및 반전 운동을 트집 잡아 그의 여권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51년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밝힌 바 있는 폴링은 1953년 2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DNA가 3중 나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2개월 후 그의 주장이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왓슨과 크릭이 ‘2중 나선 DNA’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폴링은 자신의 연구가 잘못됐음을 인정했으며, DNA 구조를 정확히 밝힌 왓슨과 크릭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왓슨과 크릭의 2중 나선구조 발상에 힌트를 준 것은 바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은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폴링이 불참했던 심포지엄에서 공개되었으며, 만약 그때 폴링이 그 사진을 봤더라면 틀림없이 DNA의 정확한 구조를 먼저 알아차렸을 거라는 게 이 소문의 요지다.

실제로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밝힌 방법은 폴링이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규명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남의 연구결과보다는 자신의 직감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폴링에게 씌워진 또 하나의 과학적 오명은 바로 비타민 C의 효능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말년에 비타민 C의 효능에 심취해 비타민 C에 항암 효과가 있으며 수명 연장 효과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타민 C 관련 임상 실험들은 그의 주장과 달리 암의 예방에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내고 있다. 평소 다량의 비타민 C를 복용하던 폴링은 94세까지 장수했지만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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