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시] 은실 누나
[풍경이 있는 시] 은실 누나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07.1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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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자, 바이올린 켜는 여인, 혼합재료,10호
양희자, 바이올린 켜는 여인, 혼합재료,10호

 

어쩌다가 늦게라도 하학下學하는 날
동무도 없이 별을 헤아리다
나도 모르게 이르게 되는 곳에는
담 너머 은실 누나의 피아노 소리

그 소리는
내 가슴의 별들 중에서
가장 눈부신 별이었습니다.

먼 나라에 다녀와서 잠시 들렀다는
은실 누나의 피아노 소리는, 매번 
은실 누나가 살았다는 나라보다 
눈부시고 화려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은실 누나가 건너왔다는 바다가 보였고
은실, 금실 출렁이는 바닷고기들이
내 가슴에서 한 옥타브만큼씩 뛰었습니다.

서울에서 전학 온 내 동무의 이종姨從
한 번도 보지 못한
은실 누나의
담 너머 피아노 소리를 들었던 날은

동구 밖 숲 속에서
잠들지 못한 새들이 밤새도록
사춘思春, 사춘 울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년 독일 시인)의 시,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햇빛처럼 꽃보라처럼/또는 기도처럼 왔는가.//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날개를 거두고/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하얀 국화가 피어있는 날/그 집의 화사함이/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그날 밤늦게, 조용히 네가/내 마음에 닿아왔다.’(하략)

여러분들의 그것은 어떻게 오는지요. 무지개처럼, 음악처럼, 향기처럼, 온기처럼, 봄처럼, 가을처럼, 꿈처럼, 비처럼, 입맞춤처럼, 눈짓처럼, 포옹처럼 그것이 왔는지요.

학교를 파하고 하학하는 길, 일부로 논길 밭길, 작은 언덕. 공동묘짓길을 지나 먼 길을 더 멀리 돌아 집으로 오곤 했지요. 그때 남에게는 다 있던 공부도 숙제도 나에게는 없던 때였습니다. 나는 웬일인지 그냥 저쪽 멀리 아니면 마음속 깊이에서 맴맴 돌기만 했지요.

봄날 약간 어둑해져 있을 것인데 이층집 양옥, 내 동무 집에서 이제껏 듣지 못하던 피아노 소리가 담 밖으로 넘어왔겠지요. 라디오에서나 간간이 듣던 피아노 소리였는데, 이렇게 직접 듣기는 처음인가 싶었습니다. 나는 이어지고 이어지던 피아노 소리가 끝날 때까지 담벼락에 우두커니 서서 들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저녁밥 때도 넘기며 피아노 소리를 듣곤 했었지요. 그런 날은 봄새들은 초저녁별만큼이나 요란하게 울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요.
 
많은 세월이 흘러 고운 여자를 내 품에 안았을 때 나에게 처음의 사랑은 이미 지났다는 걸 비로소 알았습니다. 얼굴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피아노를 쳤던 사람, 어린 날, 그 피아노 소리로만 내가 상상으로 사모했던 그 사람이 나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피아노를 쳤던 사람의 이름이 ‘은실’인지, 그녀가 외국에서 살다가 왔는지, 내 동무의 이종인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그냥 ‘피아노 소리’만 윙하니 가슴에 있습니다. 이렇게 내 사랑은 이렇게 피아노 소리로 왔습니다.

아직도 봄철, 피아노 연주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동구 밖 숲 속에서/잠들지 못한 새들이 밤새도록/사춘思春, 사춘 ‘ 우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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