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제품 판매중단 확대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X'표시가된 일본 아베총리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제품 판매중단 확대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X'표시가된 일본 아베총리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로드]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일본 아베 내각은 지난 4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불화수소·레지스트·폴리이미드)에 대한 한국 수출규제를 시작한데 이어, 오는 24일 한국을 수출 우대국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공포할 방침이다.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될 경우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는 전략물자는 매번 개별 수출허가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경제보복 수위를 올리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일본은 한국으로 수출되는 전략물자가 북한 등으로 유입될 수 있다며 안보상의 이유로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게 됐다는 입장이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사례나 증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뉴스로드>는 일본이 내세운 수출규제 이유가 사실관계와 부합하는지 알아봤다.

◇ 에칭가스 북한 유출, 日 주장 근거 없어

지난 5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은 BS후지TV 프라임뉴스에 출연해 “(한국에 수출된 화학물질의)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사안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군사 전용이 가능한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아베 총리 또한 7일 BS후지TV에서 “한국은 (대북)제재를 지키고 있으며 무역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무역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하기우다 대행의 발언을 거들었다.

이는 수출규제조치가 적용된 3개 품목 중 일부가 북한으로 유입되 무기 개발에 사용될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품목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에칭가스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일본 NHK는 지난 9일 익명의 정부관계자를 인용해 “(수출규제가 적용된) 원재료는 화학무기인 사린가스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한국 기업이 발주처인 일본 기업에 납품을 독촉하는 일이 일상화됐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군사전용이 가능한 물자가 한국에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다른 나라로 넘어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이번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한 배경”이라고 전했다.

NHK는 지난 9일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고순도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유입돼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사용됐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NHK 홈페이지
NHK는 지난 9일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고순도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유입돼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사용됐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NHK 홈페이지

실제 수출규제 3대 품목 중 하나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공정에서는 회로를 깎고 씻어내는데 사용되지만, 이론상으로는 화학무기 제조에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불화수소를 가스형태로 흡입할 경우 체내 수분과 만나 불산으로 변해 염증 및 호흡곤란을 일으켜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또한 우라늄 광석을 녹여 고농축우라늄을 얻는데도 불화수소를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화학무기·고농축우라늄 생산에 순도 99.999%의 고순도 불화수소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다. 보관이 어렵고 비싼 고순도 불화수소가 아니라 한국·중국 등에서 흔하게 생산되는 저렴한 저순도 불화수소로도 쉽게 화학무기나 고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기 떄문이다. 즉, 손쉽게 중국 등지에서 저렴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데, 굳이 한국을 통해 값비싼 일본산 에칭가스를 들여올 이유가 없다는 것.

성영은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지난 10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불화수소가 우라늄을 암석에서 추출하거나 할 때 녹여낼 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고순도가 필요 없고 97% 정도의 저순도를 써도 충분히 녹여낼 수 있다”며 “그런 (저순도) 불화수소는 북한에도 있기 때문에 굳이 일본 고순도를 들여서 농축하는데 사용할 이유는 없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유독물질인 만큼 에칭가스는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수입·취급·이동이 엄격하게 관리된다. 성 교수는 “반도체 회사는 반도체 생산량에 따라 그 사용량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계산해 보면 금방 나온다”며 “충분히 추적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본의 주장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또한 9일 “불화수소가 북한을 포함한 유엔 결의 제재 대상국으로 유출됐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관련 기업들이 전략물자 수출통제와 관련한 국내 법령에 따라 수출 허가를 받고, 최종 사용자 보고 등 각종 의무도 적법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고 밝혔다. 

◇ ‘캐치올’ 규제, 한국이 일본보다 ‘엄격’

일본 측은 지난 12일 도쿄 지요다구 경제산업성 별관에서 열린 한-일 과장급 회의에서 수출규제 이유로 제시한 ‘부적절한 사례 발생’에 대해 “‘제3국으로의 반출’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에칭가스의 대북 반출에 대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한발 물러선 것. 대신 일본 측이 새로이 내세운 수출규제 이유는 바로 ‘캐치올’(Catch All) 규제의 작동 여부였다. 

캐치올 규제란 말 그대로 전략물자가 아닌 일반적인 물품이라고 하더라도 대량살상무가로 사용될 위험이 있는 경우, 당국이 수출을 통제하도록 하는 제도다. 일본 측은 회의에서 한국이 재래식 무기 관련 수출에 대해 캐치올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상은 일본 측 주장과 다르다. 일본의 캐치올 제도는 수출대상이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된 우대국이거나 재래식 무기 관련 수출인 경우 보고 의무가 없다. 반면 한국은 모든 대량살상무기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와 관련된 수출인 경우에도 수출업자에게 보고 의무가 부과되며, 화이트리스트라 하더라도 무기전용을 인지한 경우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즉, 한국이 일본보다 더 강력한 캐치올 규제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은 12일 “한국은 재래식 무기에서도 한국은 캐치올 제도를 엄격하게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포괄범위와 한국의 포괄범위가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일본에 못지않은, 오히려 어떤 경우엔 일본보다 더 철저하게 캐치올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라는 취지로 (일본 측에)설명했다”고 밝혔다. 

이호현 산업부 무역정책관이 12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한일 양자실무협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호현 산업부 무역정책관이 12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한일 양자실무협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전략물자 통제 협의 중단, 귀책 사유는?

일본 측은 또 전략물자 수출 통제 협의체가 운영되지 않아서 신뢰관계 형성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도 내세웠다. 

전략물자 수출 통제와 관련해 한일 양자 협의는 지난 2008년 이후 서울과 도쿄에서 6차례 진행됐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016년 6월 국장급 협의가 있었으며, 지난해 2월에는 일정만 조율하고 실제 협의는 무산됐다. 3년 간 양자협의가 없었던 셈이니 일본 측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양자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귀책사유가 한국에게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 무역정책관은 “협의회 일정을 잡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양측 모두 어려움이 있었다”며 일정 조율 과정에서 상황이 맞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한일 양국은 올해 3월 이후 양자협의를 갖자고 지난해 말 합의한 바 있다. 양자협의 중단이 불신의 이유라면 수출규제라는 공격적인 조치 이전에 이미 약속된 협의 일정의 재개를 요청하는 것이 수순이다.

또한 양자협의체가 아니더라도 양국 실무진의 만남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무역정책관은 “국제 통제체제 관련 각종 세미나라든지 콘퍼런스, 국제통제 회의, 실무자 그룹회의 이런 게 있고 일본에서 아시아 통제체제 관련한 세미나도 거의 1년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며 “그런 자리에서 충분히 한일 간의 협의나 정보·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한국은 지난 2013년부터 매년 아시아 수출통제 세미나를 개최해 일본 경제산업성과 만남을 가져왔다. 지난해는 서울에서 산업부와 경제산업성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안에 대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할 때, 수출통제와 관련해 한일 간의 대화가 단절돼 신뢰관계가 훼손됐다는 일본 측 주장은 무리가 있다. 

뉴욕타임스는 15일(현지시간) 안보를 이유로 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자유무역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사진=뉴욕타임스 홈페이지
뉴욕타임스는 15일(현지시간) 안보를 이유로 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자유무역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사진=뉴욕타임스 홈페이지

◇ 뉴욕타임즈 "아베 '트럼프 따라하기'" 비판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일본이 이번에 전례 없이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것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며 “이번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는 상호의존과 상호공생으로 반세기 간 축적해온 한일 경제협력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우리 기업들이 일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우리는 과거 여러 차례 전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며 강경한 대응을 예고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를 바라보는 해외의 시선도 곱지 않다. 뉴욕타임스(NYT)는 15일(현지시간) “일본이 자유무역을 탄압하며 ‘국가 안보’를 언급했다. 어딘가 친숙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나”라며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비판했다. 안보를 이유로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해온 트럼프 정부를 아베 내각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 NYT는 아베 총리가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 이틀만에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했다며, “일본의 조치는 지난 수십년간 세계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해온 국제무역규칙에 대한 가장 최근의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일본은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넘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 승리와 평화헌법 개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며 아베 내각이 경제보복 수위를 낮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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