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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에 진행된다. 1901년 첫 번째 노벨상 시상식에서 상금을 받은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은 자신이 재직하던 대학의 과학 발전과 장학금을 위한 기금으로 상금 전액을 기부했다. 바로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빌헬름 뢴트겐이 그 주인공이다.

1845년 프로이센의 레네프에서 직물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난 뢴트겐은 어린 시절 네덜란드 아펠도른으로 이사해 그곳의 위트레흐트공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선생님의 초상을 불경하게 그린 사건이 발생했다.

 

뢴트겐은 학교 측의 끈질긴 추궁에도 끝내 친구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끝내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게 된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곳은 졸업장 없이 시험만으로 진학할 수 있었던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이었다.

그곳에서 수학과 화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A. 쿤트의 조수가 되어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일하게 된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크대학 등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의 물리학과 정교수가 되면서 안정된 연구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 기체의 비열, 석영의 전자기적 성질, 전자기장에 의한 편광면의 변이문제 등을 연구하던 그는 1888년 뷔르츠부르크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다시 돌아오면서 음극선 연구에 착수한다.

1895년 11월 8일 금요일 저녁, 뢴트겐은 음극선관을 검은 마분지로 싸서 빛이 새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실험실의 불을 모두 끄고 음극선관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조금 떨어져 있던 책상 위에서 밝은 빛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빛이 비친 것은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었으며, 빛이 나온 곳은 바로 검은 마분지로 막은 음극선관이었다.

그는 음극선관과 스크린 사이를 두꺼운 책으로 막아 보았다. 빛은 그마저 통과해 비쳤다. 나무와 고무도 마찬가지였다. 그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물건은 1.5㎜ 이상의 납뿐이었다. 그 빛이 기존에 알려진 음극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 뢴트겐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그 빛에 대해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퇴근도 하지 않고 주말 내내 실험실에서 보내던 뢴트겐은 퍼뜩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대개의 빛이 사진 건판에 감광되어 사진이 찍히듯 그 빛도 건판에 감광되면 어떤 영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가 그 빛으로 사진을 찍기로 한 첫 번째 대상은 아내 베르타의 손이었다. 그 결과 아내의 손가락뼈와 결혼반지가 선명하게 보이고 뼈 둘레의 근육은 희미하게 나타난 사진이 찍혔다. 자신의 손을 찍은 최초의 X선 사진을 본 아내는 놀란 나머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마치 나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군요.”

그 후 몇 주를 꼬박 실험실에서 보낸 뢴트겐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새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정리해 12월 28일 뷔르츠부르크 물리학회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불과 보름 후 그는 스타 과학자가 되었다.

다음해 1월 13일 베를린으로 간 그는 황제 빌헬름 2세 앞에서 X-선 사진을 시연했으며, 1월 23일에는 뷔르츠부르크에서 대중강연회를 열었다. 그의 논문은 영어로 번역되어 ‘네이처’와 ‘사이언스’지에 잇달아 게재됐다.

X-선 사진은 곧바로 의학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등에 꽂힌 칼의 나머지 조각이나 어린이의 목에 걸린 동전을 X선으로 찾아낸 것이다. 바로 그해 스코틀랜드의 왕립병원에는 X-선 담당부서가 생겨 신장 결석을 발견했으며, 1년 만에 X-선 관련 논문 1000종과 단행본 50권이 출판될 정도였다.

심지어 X-선 기계를 흥밋거리로 들여놓는 극장 공연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X-선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를 쏟아내는 신문들도 많았다. X-선으로 사람의 알몸을 촬영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그러자 한 란제리 제조업체에서는 X-선이 통과되지 않는 속옷을 만들어 광고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X-선으로 인해 현대 물리학의 시대가 열렸다는 의견이 많을 만큼 뢴트겐의 발견은 과학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 뒤를 이어 방사능 및 전자, 방사성 원소 등이 발견되고, 물질을 이루는 작은 입자들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DNA가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X-선 결정학 기술 덕분이었다.

퇴학을 당해도 친구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강직했던 뢴트겐은 물질적인 부분에서도 초연했다. 1919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그는 말년에 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모아둔 재산이 많지 않았던 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 독일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사실 뢴트겐은 X-선의 발견 직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특허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X-선과 관련해 어떠한 특허나 이익도 거부했다. X선은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므로 모든 인류의 자산이라는 이유에서다.

말년에 겪은 생활고 속에서도 그의 이 같은 신념은 변치 않았다. 인류에게 X-선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남긴 그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던 셈이다. 뢴트겐은 은퇴한 지 4년 후인 1923년 2월 23일 뮌헨에서 악성종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X-선 실험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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