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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입자'로 유명한 물리학자 리언 맥스 레더먼(Leon Max Lederman)은 역대 노벨상 수상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일화가 전해진다. 198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그는 상으로 받은 메달을 경매를 통해 팔아치웠고 말년에는 심한 치매로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등 힘들게 살았다. 

1922년 뉴욕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유대인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시립대학을 졸업한 후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신호대에서 중위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1951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의 네비스연구소를 비롯해 브룩헤이븐연구소, CERN, 페르미 연구소 등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1979년에는 페르미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1989년까지 재임하며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입자가속기였던 ‘테바트론’의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업적은 과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 중 하나였던 ‘두 개의 중성미자 실험’이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가 1930년대 초반에 그 존재를 예측한 중성미자는 질량이 전혀 없어 1초에 1제곱센티미터당 수십억 개씩 지구를 통과해 지나가는 입자다. 레더먼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해 10톤 무게의 거대하고 정교한 검출기와 13미터 두께의 강철벽을 지닌 중성미자 빔을 만들었다.

멜빈 슈바르츠, 잭 슈타인버거와 함께 공동으로 설계한 이 세계 최초의 중성미자 빔으로 레더먼은 그때가지 같은 것으로 생각해온 전자중성미자와 뮤온 중성미자가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중성미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후 타우 중성미자도 발견됨으로써 중성미자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즉, 이들의 연구결과로 자연에 존재하는 4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 하나인 약력의 존재가 밝혀지게 된 셈이다.

이 업적으로 그는 슈바르츠, 슈타인버거와 공동으로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듯하다. 1988년 10월 19일 새벽에 집의 전화벨이 울리자 아내에게 “아마 노벨상위원회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977년에 입실론 입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물질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소립자인 입실론은 바닥 쿼크가 든 입자 중 가장 가볍다. 이 발견으로 그는 바닥 쿼크에 대한 최초의 실질적인 증거 및 3세대 쿼크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힉스 입자’에 ‘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갖게 한 저서 덕분이다. 질량의 근원과 우주 생성의 비밀을 밝혀낼 단서가 되는 힉스 입자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피터 힉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됐다. 그런데 레더먼이 1993년 작가 딕 테레시와 함께 힉스 입자 연구를 다룬 저서 ‘신의 입자’를 발간한 이후 힉스 입자는 신의 입자로 불려지게 됐다.

이에 대해 피터 힉스는 자신이 무신론자이므로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로 부르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레더먼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지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그가 생각한 제목은 ‘신의 입자(God Particle)’가 아니라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였다.

그런데 출판사 편집자가 언어순화를 위해 ‘damn’을 뺄 것을 제의했고, 출판사의 그 같은 제의에 레더먼이 동의함에 따라 ‘신의 입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처음에 레더먼이 힉스 입자에 대해 ‘빌어먹을 입자’라고 쓴 것은 분명히 있어야 할 입자인데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원망스럽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었다.

이처럼 그 존재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입자물리학자들의 애를 태운 힉스 입자는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에서 건설한 역사상 최대의 가속기 실험장치인 대형강입자가속기(LHC)에 의해 2012년 7월 발견됐다.

레더먼 박사는 정부의 과학정책 개선 및 후학 양성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통령 직속 과학자문위원회와 의회, 에너지부 등을 직접 설득해 ‘고에너지 양성자・반양성자 충돌기’ 건설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그는 페르미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주말 물리 프로그램’을 개설해 인근 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시카고 인근에 수학・과학 영재 고등학교의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가 말년에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끈 것은 노벨상 메달 경매 사건 때문이다. 그는 1988년에 받은 노벨상 메달을 지난 2015년 5월 경매장에 내놓았다. 경매시장에 등장한 역대 두 번째로 생존해 있는 노벨상 수상자의 메달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끈 이 메달은 최초 입찰가의 2.5배가 넘는 76만5002달러(당시 한화 약 8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지난 30년간 경매시장에서 거래된 10개의 노벨상 메달 중 네 번째 고가 기록으로 알려졌다. 역대 경매에서 최고가를 받은 노벨상 메달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의 것으로 약 474만 달러에 거래됐다.

경매 당시 레더먼은 노벨상 메달을 파는 이유에 대해 ‘20여 년간 선반 위에만 놓여 있던 메달 판매금으로 물리학 연구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하지만 추후 메달을 판 진짜 이유는 그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년에 심한 치매를 앓았던 그는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노벨상 메달을 내놓게 되었는데, 그의 사후 일부 언론은 비싼 의료비 때문에 노벨상 메달까지 팔아야 하는 미국의 의료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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