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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모두 노벨상을 받은 경우는 지금까지 총 다섯 번 있었다. 그 중 네 쌍의 부부는 같은 분야에서 함께 연구한 업적으로 공동 수상한 경우였다. 나머지 한 쌍의 부부만 다른 분야에서 각각의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군나르 뮈르달과 1982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알바 뮈르달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30년대 초 뮈르달 부부의 조국인 스웨덴은 상당한 경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대서양으로 대형 화물선이 다니게 되면서 값싼 미국 농산물이 대거 수입되자 경쟁력을 잃은 스웨덴의 시골 주민들이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대거 이민을 떠나버린 것.

거기에다 미국 대공황의 여파까지 몰아치자 경제의 활력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구 감소와 경제 불황에 출산율마저 떨어지자 스웨덴 내의 여론은 혼자 살거나 애를 안 낳는 젊은 여성들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1934년 9월에 발간된 뮈르달 부부의 ‘인구 문제의 위기’라는 책은 스웨덴은 물론 선진국들의 인구 정책에 대해 정확한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들은 이 책에서 출산율 저하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막연한 캠페인이나 정책보다는 여성의 취업 기회를 보장하고 아이들을 국가가 보살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외에도 내 집 마련과 출산‧육아에 따른 비용, 여성들의 경력관리 등 다양한 해결책이 종합적으로 제시됐다.

스웨덴 정부는 남편인 군나르 뮈르달을 상공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그들 부부가 제안한 정책을 자신들이 직접 수행하도록 맡겼다. 이때 뮈르달이 도입한 육아휴직제도는 저출산 문제뿐만 아니라 고용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쳐 주목을 끌었다.

기존의 육아휴직제도와는 달리 남성과 여성이 육아휴직을 의무적으로 반반씩 사용하도록 한 정책이었던 것. 고용주가 젊은 여성의 채용을 꺼리는 이유는 바로 육아휴직 때문인데, 남성도 똑같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게 되자 고용시장에서의 남녀 차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성평등문화는 지금도 스웨덴의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산율이 2.0명 이하로 떨어질 때 시작한 뮈르달의 정책은 이제서야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1990년대 말 1.5명으로 최저 출산율을 기록한 스웨덴은 최근 들어 합계 출산율 1.88명을 기록한다. 유럽연합(EU)의 최근 연구결과에서도 성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출산율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군나르 뮈르달은 흑인 및 빈곤층 등 사회의 소외계층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흑인문제에 관한 ‘미국의 딜레마’, 후진국 문제를 분석한 ‘경제이론과 저개발지역’, 아시아의 빈곤문제를 분석한 ‘아시아의 드라마’ 등이 그의 대표 저서다.

특히 빈곤이 빈곤을 낳는다는 ‘누적과정 이론’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기존의 경제학 개념에서는 어떤 외부적 충격이 발생할 경우 그 변화를 상쇄시켜주는 반대 방향에서의 변화가 일어나 안정적인 균형을 이룬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뮈르달의 누적과정 이론은 그 같은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서는 자동적인 자기 안정화 장치가 없어 불균형이 더욱 심한 불균형을 촉발한다는 게 바로 누적과정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입증하는 주요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군나르 뮈르달은 저개발국가의 경제개발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하이에크와 공동으로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뮈르달이 시장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인 하이에크와 함께 상을 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편, 군나르보다 4살 연하인 알바 뮈르달은 1902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태어났다. 개방적인 아버지와 달리 알바의 어머니는 딸이 상급여학교에 진학하는 것조차 반대할 만큼 매우 보수적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이겨내고 1924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알바는 바로 그해 스톡홀름대학에서 만난 군나르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 군나르와 함께 인구 및 여성 문제에 집중하던 그녀가 핵군축 등 전 세계의 평화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인도에서 초대총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알바 뮈르달은 1955년 스웨덴 최초의 여성 대사로 임명되어 인도와 미얀마, 스리랑카 등지에서 6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귀국한 이후 그녀는 1961년 스웨덴 국회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 군축의 필요성을 연설하며 본격적으로 평화운동에 매진했다. 유엔 군축회담 대표로 임명돼 군축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던 중 1968년에는 스웨덴 정부의 핵 보유 포기 선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밖에도 미소 양국의 군비증강 경쟁을 둔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그녀는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1982년 멕시코의 알폰소 로블레스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유엔 군축위원회 멕시코 수석대표로 활약한 알폰소 로블레스는 중남미 21개국의 비핵지대화조약에 대한 안건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지적 관계를 추구했던 뮈르달 부부는 62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금슬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1986년 알바 뮈르달이 사망하자 군나르 뮈르달 역시 이듬해에 아내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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