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일찍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를 가리켜 ‘심산유곡에 핀 한 떨기의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 말했다. 비록 세상은 흙탕물로 가득하지만, 거기서도 정치는 꽃망울을 틔워낸다는 것이다. 언제나 정치인을 욕해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무슨 일이 생기면 광화문광장부터 찾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문장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원시 공산사회에서 평등하게 지내다가 생산수단이 탄생하면서부터 빈부격차와 권위주의적 지배가 탄생한 것일까? 『침팬지 폴리틱스』의 저자 프란스 드 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자리매김하기 훨씬 이전부터 정치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인 드 발은 1975년부터 6년간 네덜란드 아른험에 있는 동물원에서 매일 같이 침팬지 무리를 관찰했다. 총 25마리인 집단은 이에룬, 라윗, 니키와 같은 어른 수컷과 마마, 이미, 테펄과 같은 어른 암컷, 그리고 새끼들을 비롯한 다른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찰 초기에는 누가 봐도 이에룬이 위계구조의 정점에 있었다. 이에룬은 집단에서 행해지는 ‘인사(submissive greeting)’의 3/4 이상을 독점했고, 다른 수컷이 암컷과 교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지체 없이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이에룬이 점점 나이가 들고 쇠약해짐에 따라 라윗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라윗은 이에룬이 어른 암컷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신경질을 내며 그 둘을 떨어뜨렸지만, 평소에는 암컷들의 털을 골라주거나 새끼들과 놀아주는 유화전략을 펼쳤다. 또 다른 수컷 니키가 이에룬 지지 암컷들을 괴롭히는 지원사격을 펼치자 라윗은 점점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이에룬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라윗이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알파메일이 된 라윗은 이윽고 니키와의 동맹을 버리고 오른팔로 이에룬을 택한다. 그러나 이에룬은 다시 라윗을 배신하고 니키와 손을 잡는다. 또 한 번 서열이 뒤바뀌고, 가장 어린 수컷인 니키가 왕좌에 등극하게 된다. 니키는 이에룬과 라윗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집단의 존경을 받는 이에룬에게 치안 유지를 맡긴다. 일종의 집단지도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니키의 권력은 순탄하게 유지되었을까? 그럴 리 없다. 이에룬이 니키와의 다툼 끝에 지지를 철회하자 라윗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라윗의 천하는 단 10주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결국 고환이 잘리는 복수를 당한 채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시 왕위를 되찾은 니키도 경쟁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다 익사했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젊은 수컷인 단디가 차지했다. 이 모든 상황에 참여하고 때로는 연출까지 도맡은 이에룬은 몇 년이 지나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권모술수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서열이 낮은 개체는 서열이 높은 개체를 보면 굽실거리며 인사를 한다.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키스를 통해 화해를 도모한다. 지위를 상승시키고 싶을 때는 털을 곤두세우며 과시행위를 하고, 긴장이 극에 달할 때는 서로 털을 골라주며 숨을 고른다. 이 모든 행위는 각자의 권력과 영향력, 그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계속 변주된다. 물리적 폭력만 배제한다면 인간의 일상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인간이 정치를 탄생시켰다기보다, 정치가 인간을 빚어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다만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데 훨씬 능숙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신을 위해, 사회를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정치에 뛰어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레토릭과 실제 모습이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추악한 정치질’을 맹비난한다. 그렇지만 추악한 정치질이 실제 정치의 속성인 것을 어쩌겠는가. 먼저 우리의 전제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는 방법만이 실제 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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