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폭풍우 한가운데서
[임순만 칼럼] 폭풍우 한가운데서
  • 임순만(언론인)
  • 승인 2019.08.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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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태도가 가관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늦어도 2045년 광복 100주년에는 평화와 통일로 하나 된 나라(One Korea)로 세계 속에 우뚝 서도록 기반을 단단히 다지겠다”고 한반도 통일시간표를 제시했다. 그러자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은 바로 다음날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막말을 쏟아냈다. 

조평통은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행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남대화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자의 자행의 산물이며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시계를 과거로 돌려버렸다. “아랫사람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 당국자”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스러운 사람” 등의 언사까지 동원했다. 

일본은 또 어떤가. 문 대통령은 전과 달리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한일간 무역분쟁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5일 도쿄 지요다구 일본 부도칸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 기념사에서 7년째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가해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이후 역대 총리들이 언급해 온 “아시아 제국의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긴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는 표현은 빠졌고, 역대 총리들이 밝혀온 “부전(不戰·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의 맹세”도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바꿨다. 한국에 눈길을 준 흔적이 전무하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며칠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낸 아름다운 친서를 받았다. 나도 한·미 연합 훈련 좋아하지 않는다. 북한 미사일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니 아무 문제없다”고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뉴욕 브루클린 임대 아파트에서 월세 114달러 13센트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방위비 인상)를 받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외교의 상식적 수준을 벗어나 있다.

지금 한국의 외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냉정을 가장한 아베가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자기 갈 길을 고수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동맹이 무색해지는 홍두깨 같은 발언을 쏟아낸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된 북한은 한동안 자제해왔던 특유의 비외교적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고. 러시아 군용기는 한국 영공을 침범하며 국제정세를 시험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에는 문 대통령을 비판·험담하는 지식인들이 강가의 조약돌처럼 쫙 깔려있다. 

가장 어리석은 전략을 구사하는 나라는 북한인 듯하다. 북한이 한국의 미사일 방어시스템의 허점을 노리면서 미국의 두둔 아래 미사일 기량 향상을 획책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미국이 북한을 두둔할 리는 만무하다. 미국은 북한의 전면 핵포기 결정 외에는 북한과 실무협상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한과의 실무 협상이 조만간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하지만 그 전제조건은 북한이 핵무기와 운반 시스템을 포기한다는 명확한 전략적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그는 트럼프와는 달리 북한의 KN23 미사일 발사가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임을 분명히 지적한다. 

다중적인 미국의 전술에 대비하지 못하고 시종 구태의연한 벼랑끝 전술로 버티려는 북한은 2박3일에 걸친 4500여 km의 전용열차 여정의 노력조차도 단 칼에 망신을 주는 트럼프 외교라인을 넘을 수 없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시시각각 카드를 달리하는 미국을 상대로 한국을 제쳐놓고 뭘 해보겠다는 북한의 계산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수십년간 공을 들여온 영변 핵단지를 스스로 폐기하겠다고 나서는 김정은 위원장은 한 것이 없다. 북한경제를 점차 질식시키고 있는 제재를 해제시키는 데 절박해 보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를 구축해 이 제재의 덫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고 있다면 이는 ‘순진한 발상’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자신들이 뭘 해도 근본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는 미국을 상대로 북한이 단독으로 이뤄낼 것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최근의 도발적 미사일 발사 역시 북한에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2일 중거리핵전력(INF)조약 탈퇴를 공식 선언한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 내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의 역내 미사일 추가배치를 막고자 하는 중국은 앞으로 북한 비핵화를 더 압박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위원장은 앞으로 뭘 해도 일이 제대로 풀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재개를 대수롭지 않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한국 정부는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게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INF 조약 폐기 결정은 아태지역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중국이 방위력을 강화하게 되면 러시아의 움직임도 배가될 것이다. 한국으로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수용할 경우 중국의 무역 보복을 초래하는 등 외교적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과 타이완은 중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보기 때문에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면 억지력을 증진할 수 있는 재래식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찬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중첩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한국정부는 외부적으로는 먼저 승자 없는 한일간 무역 갈등 국면을 해소할 모멘텀을 찾아야 한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 자존심 싸움을 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같은 패를 너무 쉽게 꺼내드는 것은 약자의 즉흥적 전략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계속적인 대립은 한미일 대북공조만 어렵게 만들 것이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한국이 우위를 점하는 방식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임시방편적으로 대처해온 대북정책에는 일관성을 도입해야 한다. 아닌 것에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해야 한다. ‘북한과 합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은 유치해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좀 더 겸양하고 포용적인 모습으로 통합에 힘썼으면 한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해왔다. 듣기에 거북해하는 사람들은 적으로 간주하는 듯한 발언이다. 선명성을 내세우는 정치는 구시대적이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구호 외치듯 하는 것을 보는 국민들은 대통령이 조급증을 앓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5년 단임대통령이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부작용이 생길 것이다. 박근혜 전임 대통령의 결정적인 패착은 임기 후반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자기착각 속에서 오만하게 정치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 대통령의 덤덤하면서도 깊은 지략이 빛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다. 

언론인 / 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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