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단하고 마음이 어수선할 때, 보노보노와 곰돌이 푸를 읽어도 좀처럼 위로를 얻지 못하는 나는 종종 철학자들의 인생을 뒤적여 본다. 견고한 사상만큼이나 난공불락일 것만 같은 삶. 그러나 실은 결함투성이였던 삶. 그 결핍을 친구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갔던 삶. 그들의 일생은 모험이자 좌절이었고, 불안이며 고독이었다.

이 책에는 총 6명의 철학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그리고 니체까지. 모두 시대의 흐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 파도에 휩쓸려 넘어지기도, 한계에 부딪쳐 아등바등하기도 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칸트와 쇼펜하우어다.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신체는 볼품없지만 머리는 좋은 모범생이었던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강사가 되었다. 철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윤리학, 법학, 신학, 천문학, 지리, 역사, 화학, 광물 등을 가르쳤던 칸트는 탁월한 강의 실력에도 16년간 눈물 젖은 빵을 먹었고, 46세에 정교수가 되고 나서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까지 1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칸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났다. 체중은 평생 50킬로그램을 유지했고, 하루에 한 끼를 정확히 3시간 동안 즐겼다. 오후 3시 30분에는 언제나 산책을 했고, 10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서는 언제나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 잠을 청했다. 그는 집사에게 10년간 같은 옷만 입도록 명령했는데, 집사가 딱 한 번 색다른 패션을 선보이자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 

철학 뿐 아니라 일상에도 영국 경험론을 적용한 칸트는 시시때때로 이론을 수립했다. 코감기에 걸렸을 때 코로만 숨을 쉬면 낫는다거나, 기침감기가 정신력으로 극복 가능하다거나, 방 안에 빛이 들면 벌레가 증식한다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도전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에, 하인들이 몰래 침실을 청소하고 환기를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79세에 갑작스레 쓰러진 칸트는 ‘좋군(Est is gut)’이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788년에 태어난 쇼펜하우어는 어렸을 때부터 음울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특히 17살 무렵 아버지가 자살한 사건이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반면 언제나 낙천적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 이후 살롱을 열었는데, 괴테와 그림 형제 등 유명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날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를 지켜본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기적인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여성 혐오 사상을 굳혀갔다. 

어느덧 30대가 된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그는 사기꾼 헤겔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헤겔과 강의 시간을 똑같은 시간으로 맞췄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강의는 정원 미달로 폐강되었고, 헤겔의 강의는 정원이 초과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굴하지 않고 헤겔의 수업 시간에 학생인 척 잠입해 괴상한 질문을 날렸다. 이것도 모자라 애완용 푸들을 구해 헤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개가 실수를 할 때마다 헤겔의 이름을 부르며 구박하기 위해서였다. 

베를린에 콜레라가 돌자 쇼펜하우어는 신속하게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다. 칸트를 존경했던 그는 칸트처럼 정확한 시간에 특정 장소에 나타남으로써 도시의 아이콘이 되고 싶었다. 그는 걸으면서 자신의 철학의 내용을 중얼거렸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는 대신 어머니에게 아드님을 챙겨주셔야 할 것 같다고 연락했다. 

쇼펜하우어는 60대가 되고 나서야 세계적인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집인 『여록과 보유』가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푸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를 자선단체에 남겼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면서도 타인을 의심하고 경멸했다.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평생 어머니와 하녀에게 보살핌을 받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염세와 비관으로 보냈지만 성공이 찾아오자 낙천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삶과 철학은 이렇듯 모순으로 가득했다. 

더할 나위 없이 치열하고 때로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 철학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철저한 개인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본디 의심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자신을 규정짓는 사회의 자장을 벗어나려 애를 쓰면 쓸수록 반작용은 더욱 거세진다. 철학자들도 기본적으로 인간이기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소외감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의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삶을 남에게 의탁하지 않고, 꿋꿋이 고집스럽게 하루를 살아갔다. 

결국 분명한 사실은 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욕망하는가? 나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고독은 필연적이다. 낙심하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오늘의 고통스러운 하루도 나라는 인간을 빚어내기 위한 질료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설사 오늘과 다를 바 없어 보일지라도, 일단 내일을 열어보겠다. 살아보겠다. 흔들릴지언정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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