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며느리밥풀.
꽃며느리밥풀.

 

태풍이 지나간 자리가 크다. 태풍은 산하를 할퀴고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보이는 형체를 부수는 힘에 경악 한다.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느낀다. 소리 없이 조용히 불던 바람이 큰소리를 냈다. 태풍은 우리말로 싹쓸바람이라고 하는데 많은 것을 싸악 쓸어 버렸다. 쓸어가려면 저 DMZ나 쓸어갈 것인지 애잔한 농작물만 쓸어 가는가. 망연자실한 농부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초가을에 부는 태풍은 아무런 의미도 도움도 되지 않는다. 분노의 마음을 접고 다시 흔적을 지우고 메우려 간다. 

숲 가장자리에 고개를 들고 항변하는 꽃을 보았다. 스러진 모습에서 원망의 몸짓을 보낸다. 새색시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얀 쌀알 두 개가 보인다. 포악한 시어머니에 대하여 꽃으로 항거하며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으로서 피어나는 ‘꽃며느리밥풀’이다.

꽃며느리밥풀
꽃며느리밥풀

 

측은지심인가. 그래,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한(恨) 이고 며느리가 되는 죄 인가. 욕심 많은 시어머니를 만난 잘못 이겠는가. 잘못된 만남으로 며느리의 고통과 한(恨)이 죽음으로 피맺힌 한을 품고 피어나는 고부갈등의 대변자요 대명사이다. 밥이 잘 되었나 주걱으로 확인하다가 시어머니 앞에 밥을 먹는다고 맞아서 죽었다. 그래서 무덤에서 쌀밥처럼 생긴 꽃이 피었고, 이름을 꽃며느리밥풀이라 하였다는 슬픈 전설이다.

고부갈등(姑婦葛藤)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고부관계는 바뀌어 지금은 시어머니가 시집살이 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칡과 등나무 덩굴처럼 어울리기가 힘든가 보다.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산다는 건 사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시’자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고 시큼한 음식이 싫다고 한단다. 이번추석에는 고부갈등이 없었겠지. 이제는 없겠지. 꽃송이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꽃 이름이 조금이상하지 않는가. 다른 꽃들은 ‘꽃’ 자가 할미꽃, 초롱꽃처럼 뒤에 붙는데 앞에 붙어 있다. 왜 이럴까? 며느리밥풀 속(屬)에는 변종이 많아서 ‘꽃’은 유사 변종을 구분하기 위한 접두어이라고 한다.

꽃며느리밥풀.
꽃며느리밥풀.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부르는 분이 많고 쉽게 부른 이름이지만 국가표준식물 목록에는 ‘꽃며느리밥풀’로 등재되어 있다. 현삼과에 속하는 일년초로 분홍빛 꽃이 단아하고 앙증스럽다. 가련한 꽃송이가 어찌 보면 뱀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반 기생식물로서 ‘꽃밥알풀’ ‘꽃며느리바풀’ 이라고도 한다.

지금 벼 이삭이 익어가니 쌀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이런 전설을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옛날에 아니 70년대 까지도 쌀밥은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1인당 136.4kg을 먹었다. 그런데 2018년에 쌀 소비량이 61Kg로 떨어졌다. 20kg짜리 3포대정도 먹었다는 의미다. 덩달아 쌀값도 하락되어 농부들의 근심걱정이 많다. 이제는 귀한 쌀밥이 아니라는 현실에 가슴 아프고 슬프다. 쌀밥 때문에 죽은 며느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 면은 억울하다고 하겠다. 세상을 잘못 만난 탓이라고 원통해 하겠다.

꽃말이 ‘여인의 ’한’, ‘원망’, ‘질투’인데 시어머니의 질투로 며느리가 억울하게 죽어 원망과 한이 되었다. 며느리는 한(恨)을 꽃으로 승화하여 영원히 피어나는 복수(?)를 하였다. 해마다 꽃을 산하에 피워서 항변하면서 살아 있다. 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그래, 그만하자. 이제는 원망이나 질투가 없어지고 한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꽃송이도 말없이 피어 바람결에 웃음 짓는다. 더불어, 남북을 가로 지르는 철조망도 없어져서 한과 원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서로서로 도우며 풍성한 쌀밥을 같이 먹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필자 약력>

30여년간 야생화 생태와 예술산업화를 연구 개발한 야생화 전문가이다. 야생화 향수 개발로 신지식인, 야생화분야 행정의 달인 칭호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구례군 농업기술센터소장으로 퇴직 후 한국야생화사회적협동조합 본부장으로 야생화에 대한 기술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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