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들으면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09.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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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교실의 구석, Oil on Canvas, 37.9x45.5cm.
박용진, 교실의 구석, Oil on Canvas, 37.9x45.5cm.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공복이 밀물처럼 밀려 힘이 빠지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점심을 못 먹던 시간이면
그 음악 찍찍거리는 스피커를 타고
운동장과 온 교실에 울려 펴져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이제 그는 어엿한 치과 의사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서울 시민들의 상한 이를 보는 동안
개업의가 되고, 5층 빌딩도 올려
쉬는 날이면 여행도 가고, 골프도 치고
 
그러나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려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시장기
그가 제목도 모르는 그 노래를
너희들이 들으면 왈츠를 추겠지만,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중년의 적당히 나온 배 속으로
음악이 흘러들면
아직도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는 현기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우리들은 어떤 물건이나 장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추억이나 사연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 추억이나 사연을 떠올리기 위해 그 물건을 구해보거나 장소를 찾아가 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써보거나 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첩을 펼쳐보기도 합니다. 이런 물건이나 장소,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특별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또 이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환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개가 곁에 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낍니다. 물 때문에 위험을 당한 사람은 수영을 배우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봉변을 당한 장소를 가지 못하는 것도 그런 거겠지요.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지요.
 
오래전에 어느 치과 의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 배가 고프다고. 나는 무슨 음악이 배고프게 하냐고 물었지요. 의사는 말합니다. 멜로디만 알고 그 음악의 제목을 몰랐는데 어느 날 아내와 음악프로를 듣다가 그것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카이저 왈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그 치과의사는 ‘카이저 왈츠’만 들으면 배가 고팠겠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갑자기 가정이 어려워져서 여러 번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연이었겠지만 그때마다 학교 방송부에서는 그 ‘카이저 왈츠’를 들려줬다고 했습니다. 다른 음악도 많이 내보냈을 것인데 유독 ‘카이저 왈츠’만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카이저 왈츠’를 들었던 그날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많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물건에 장소에 사람에 그리고 음악에 우리는 추억의 깃대를 하나씩 세우고 있습니다.
 
그 추억의 깃대는 행복으로도 낭만으로도 슬픔으로도 고통으로도 흔들리겠지요, 그 치과의사처럼. 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추억의 음악이, 물건이 장소가 사람이 우리에는 하나씩은 있지 않나요.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 중년의 적당히 나온 배 속으로 / 음악이 흘러들면 / 아직도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는 현기 / 그 음악을 들으면 그는 배가 고프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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