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비 사막을 건너다
모하비 사막을 건너다
  • 임순만(언론인)
  • 승인 2019.09.30 09: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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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모하비사막을 건너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아프리카에서 본 작은 바오밥나무 같은 여호수아 나무와 굴러다니는 트램블링 나무가 가득한 사막 한가운데로 화물열차가 달리고 갑자기 수십대의 비행기가 도열해있는 비행장이 나타난다. 사막의 비행장을 보고 놀라는 나에게 안내인이 세계2차대전 이후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기를 맞았던 미국은 한때 이곳을 모하비 비행장으로 운영했지만 지금은 중고비행기 판매시장이 되었다고 알려준다.

무량 스님이 한국의 절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운 한국 스타일의 절이 이 근방에 있다고 한다. 예일대 학생시절 벽안의 청년이었던 그는 어느 날 기숙사에서 밖을 내려다보다가 친한 여자 친구가 어떤 남학생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것을 보고 불타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자신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무언가에 속박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숭산 스님의 제자가 된 후 그 여학생에게 통보하고 가출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사막을 이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로 180개의 컨테이너를 단 1마일(1.6km) 길이의 화물열차가 달리고, 비행장이 있는 것은 물론 800km 떨어진 로스엔젤리스 까지 물을 끌어들인 사람들의 나라이자 사막 한가운데 불야성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세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건너가고 있다. 가면서 대체 이 나라 사람들의 투지는 얼마나 크고 나의 의지는 얼마나 작은지를 비교하고 있다. 

사막은 건너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사막을 건너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벽, 또는 죽음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 다른 세상으로 가며 자신이 지금 건너가고 있는 사막을 단지 횡단이나 극복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건너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과도 만나게 된다. 왜 여기를 건너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해 이 불모의 땅을 건너는 나는 누구인가, 이 사막을 건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등의 물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자신의 내부에 숨겨두고 만나기를 두려워했던 또 다른 자아와 솔직하게 만나는 공간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정리하고 홍해를 건너 사막을 건널 때 2주일이면 충분한 거리를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배회하고 방황해야 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 그들이 가진 노예근성 때문에 그것을 다 버리기까지는 이집트에서 나올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이 세대교체를 이루는 세월인 40년이 필요했다고 분석한다. 눌리고 찌들어 새로움을 거역하는 노예근성으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억울하게 20년간의 감옥 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는 교도소 담장 아래 피어있는 들풀을 보면서 저런 풀이라도 바라보면서 맘껏 산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복역했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출소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맘껏 골목길을 산책하노라니까 더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때 저녁 골목길에서 한 부부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 부부를 보면서 그래도 싸울 마누라와 남편이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부러워하기 까지 했다.  

또 다른 수감자의 얘기다. 한 수감자는 매일 창밖의 진흙탕을 바라보며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수감자는 감옥 유리창을 통해 매일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 살았다. 진흙탕을 보며 생활한 사람은 출소 이후 평생을 진흙탕 같은 날들로 만들었지만, 별을 바라보며 생활한 수감자는 출소 이후 주위의 이웃들과 소통하며 그들에게서 하나하나 배우는 삶을 삶으로써 기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생을 살았다. 마음속에 소망을 간직한 사람은 그 소망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평생을 살게 되는 모양이다.  

사막을 건너며 나는 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오래전 요르단-이라크 사이에 가로놓인 사막을 건너 걸프전쟁을 취재하러 가던 그때 신기루와 같은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던 시절에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남들의 전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총성 없는 전쟁을 경험하며, 또한 나를 둘러싼 일상의 작은 전쟁들을 돌아보며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라크 사막을 건너던 당시의 한국은 거품이 많았고, 좀 잘 나간다싶은 직장인들은 술집에 갔다하면 양주를 몇 병씩이나 마셔대곤 했었다. 그러던 우리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르는 IMF를 맞았고, 국제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물결의 냉혹함에 가슴을 치면서 하층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은 상위층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국은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 세상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연간 강우량이 60mm 남짓한 사막에 후버댐을 만들고 그 물을 끌어들여 연간 45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치하는 도시 라스베이거스와 유흥으로 엄청난 돈을 뿌려대면서도 그것을 생산과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저들을 보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쩨쩨하게 매일 싸우는 정치에 휘말려 모두가 정치적 전사들이 되어가는지를 돌아본다.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등 네 개 주에 걸친 광활한 사막을 며칠 동안 실컷 오가면서 사막의 소리를 듣고 또 듣는다. 사막은 말한다. 더 자세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고.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라고. 너의 위대한 약속을 실천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고. 

사막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불모의 땅 사막은, 죽음의 계곡 데스밸리(Death Valley)는 불모와 죽음으로부터 일어서라고 말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대부분 불모이거나 죽음일 것이다. 사사로운 집착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오늘이 보잘 것 없더라도, 가뭄의 날이 오래 계속되더라도 자신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느냐고. 

그런 질문을 여러 번 맞닥뜨린 나는 이제 사막이 불편하지만은 않다. 사막을 건너다보면 사막은 우리 안에 스며든다. 나도 사막의 일부가 돼가는 것 같다. 무량 스님은 왜 사막 한복판에 절을 지은 것일까. 뛰어난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을 수년간 떠돈 스님이 마침내 사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사막을 어떻게 인식한 것일까.

약속을 자신들의 것으로 지켜내지 못한 이스라엘인들은 40년간 사막에서 헤매야 했다.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죄수는 복역 후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았다. 거대한 사막을 갖고 있는 나라는 위대한 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건널 사막이 있으면 좋겠다. 

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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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너 2019-09-30 10:30:53
오랜만에 읽은 멋진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