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떠남에 대해
가을, 떠남에 대해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10.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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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숙, 외로움, watercolor, 38x54cm.
신의숙, 외로움, watercolor, 38x54cm.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냇물에 발을 담그면 시린 만큼 
머리는 맑아지고
하늘이 높은 만큼 세상은 비어있다. 

새벽이면 이마까지 내리는 서리
가을 산들은 
모음母音을 닮은 신음을 내며 
점점 적막해진다.

예리한 채찍으로 바람은
나무의 이파리들을 훑어 내리고
단풍의 아름다움은 종종
떠남을 머물게 하기도 한다.

떠나는 것은 또 다른 안식을 위해
잠시 갈증을 참는 것이나
떠나와 보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나 그려왔던 것
지평선처럼 있는 게 아니니,
떠남에 무슨 뜻을 더하겠는가.

가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더라도 
삶은 그것만으로 
가을 산처럼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이니.

떠나는 것은 떠나는 것일 뿐 
그 위에 
화려한 수식의 모자를 씌우지는 말지니.

 

친구가 뜬금없이 어디로 떠나자고 합니다. 나는 깜짝 놀랍니다. 떠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합니다. 더구나 국내여행은 그렇다고 해도 해외여행은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반문합니다. 

떠나는 것은 떠나는 거지 무슨 이유가 많냐고 친구가 말합니다. 여행은 그냥 훌쩍 떠나는 거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못 떠난다고 합니다.

여행에 조건을 다는 것은 여행을 안전하게 잘하겠다는 게 아니라,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이런저런 핑계를 찾는 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일상 중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많은 준비와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적을 정하고 준비와 준비를 하는 동안, 준비의 무게에 짓눌려서 결국은 목적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적은 없나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 폴란드의 시인.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는 '두 번은 없다'는 시에서 '두 번은 없다 /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하략)

삶은 반복이나 연습이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일회성만 허락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계획하고 준비해도 우리의 계획이나 준비대로 되지는 않는 게 다반사입니다. 계획은 계획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날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떠나는 것은 어떨까요. 준비의 무게를 갖지 않고 말입니다. 산을 넘기 위해 미리 사다리를 손에 들고, 강을 건너기 위해 미리 어깨에 배를 짊어질 필요는 없겠지요. 

오늘은 필요하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냥 설렘만으로 떠나면 어떨까요. 그러나 떠나지 않더라도 삶이 훼손되는 건 아니지요. 그냥 그 자리에 있더라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어찌 보면 내면의 떠남일 수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가을은 떠나지 않더라도 떠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가을, 떠나지 않고 / 그 자리에 머물더라도 / 삶은 그것만으로 / 가을 산처럼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이니. // 떠나는 것은 떠나는 것일 뿐 / 그 위에 / 화려한 수식의 모자를 씌우지는 말지니.’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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