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침묵
  • 임순만 언론인
  • 승인 2019.10.0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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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버스가 애리조나 주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국립공원 사우스 림(South Rim) 요금소로 들어설 무렵 대부분 눈을 붙이고 있던 사람들이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곧바로 ‘아아!’ 하는 탄식으로 변했다.

"웬일이야, 왜 그래?" 단잠에 취해있다 벌떡 일어난 사람들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대지 가득히 펼쳐지는 광대무변의 협곡을 보며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풍경의 기습이라도 당한 듯 더 이상의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서두른 탓에 우리팀은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이스트 림(East Rim)에서 그날 첫 관광객으로 경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비행기가 떠오르자 거대한 협곡과 콜로라도 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왔고, 대자연이 세월 속에서 만들어내는 풍화작용의 결과를 보며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스트 림에서 경비행기 투어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3시간이나 달려 그랜드캐니언의 전모를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사우스 림으로 온 것이다. 과연 사우스 림의 마서포인트는 캐니언의 전모를 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다. 늪지대이거나 얕은 해안지대였던 지층이 3,000m 이상 들어 올려져서 형성된 콜로라도 고원 위로 로키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달리며 계곡의 지층을 깎아서 만들었다는 깊은 협곡. 지층마다 침식의 강도가 달라서 생기는 차별침식으로 인해 생겨난 수십만 개의 변화무쌍한 둔덕들, 소용돌이, 메사(꼭대기는 평탄하고 주위는 급사면을 이루는 탁자모양의 대지)와 모래벌판(사원)들이 사실상 산맥을 이루며 시야 가득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기후변화와 강물의 침식 작용이 계속되면서 생겨난 긴 협곡과 그 지류를 따라 곳곳에 인상적인 폭포를 형성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계 안내인의 설명은 마치 소리꾼이 발림을 섞어 만들어내는 판소리처럼 오똑하면서도 리드미컬했고, 관광객들에게 무수히 되풀이해 자랑하며 설명했을 구성은 멋진 경관과 어울려 곡진하게 울려퍼졌다.

“영국 BBC방송을 비롯해 세계의 여러 매체에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 1위로 꼽는 이 캐니언은 446km의 장거리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 양편계곡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캐니언은 콜로라도 강에 의한 침식으로 깊이가 1,500m나 됩니다. 이 협곡의 단층은 20억 년 지질학 역사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막힌 일이나 현상에 접하게 되면 말을 잃는 모양이다. 이런 자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흥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전율스럽기만 했다. ‘20억년의 지질학’이라는 단어 앞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오랜 기간에 걸친 역동적인 지각 활동 결과, 계곡 안에 노출된 수평 단층은 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 크게 4개의 지질 시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한다. 20억년 동안의 풍화작용이 만든 450여 km에 이르는 대협곡의 웅장한 경관을 앞에 놓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우리는 바라보는 것만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 넋을 놓고 협곡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이 특별한 이유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장관이 수십억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점과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선 크기, 그리고 그 장중한 아름다움에 있다. 강바닥이 솟아올라 3,000m의 고원이 되고 지각변동 속에서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는 계곡을 웬만한 대양보다도 깊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된 자연의 거대한 조각품, 그 위대함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뿐이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계곡이 인간에게 발견된 것은 고작 수 백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유럽 사람이 이곳에 온 것은 1540년 스페인 사람 코로나도가 이끄는 원정대의 일부가 이곳을 다녀간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그랜드캐니언이 알려진 것은 1869년과 1871년에 아메리카 군인 출신 존 웨슬리 파월(John Wesley Powell)의 탐험 결과에 의해서라고 한다.

파월은 남북전쟁에 출전해서 팔을 하나 잃었지만 이런 장애를 무릅쓰고 콜로라도 강을 두 번씩 탐험하여 그랜드 캐니언을 세상에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랜드캐니언 지역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광대무변하고 기상천외한 존재 자체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수억년을 존재하는 자연의 신비와 비의(秘義)를 대체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후 미 연방정부는 1882년 부터 그랜드캐니언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고 했으나 국립공원이 되기까지는 30여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0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내셔널 모뉴먼트’(National Monument)로 지정된 그랜드캐니언은 1919년 윌슨 대통령 재임 시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고,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대자연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을 치유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얻은 상처는 대부분 의학적 치료이거나 치유상담, 혹은 허물어진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다스려진다. 다른 인격체나 환경에서 얻은 내면세계의 상처(거부, 분노, 죄의식, 절망감, 피해의식 등)는 사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그 뿌리의 근원을 찾아들어가 그 병적인 상태를 건강한 마음으로 호전시키는 더 강력하고 선한, 그러면서도 직접적인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픈 자에게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치유의 힘을 얻는다는 것은 순전히 상처 받은 자의 몫이다. 그래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상처 입은 사람이 말없는 대상에게서 스스로 치유의 힘을 얻어낸다는 것이 보통사람의 경우로서는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이와 관련해 한 지인의 경우가 생각난다. 한 때 그는 전체의 삶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쓰디쓴 결별과 사업의 파산 등 회복하기 어려운 위기를 동시에 맞았다. “내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은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도시에서 버틸 수 없었다. 자연 속으로 깊이 들어가 산과 계곡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그 때 자연 속에는 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연 속에서 뒹굴면서 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나는 그를 상당한 공력을 축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7천만 년 전에 시작된 융기현상으로부터 땅이 들어 올려지고, 그 들어 올려진 땅이 강물에 의해 오랜 세월 깎여서 거대한 협곡을 만들어내기 까지 거기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자연은 그것을 침묵 속에서 형성시키고 존재하게 한다. 그 침묵으로부터 인과관계를 찾아내 자신의 상처를 다스리고 치유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자는 자연의 위대한 침묵을 깊이 있게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 그랜드캐니언 앞에서 비로소 그 침묵을 보고 느낀다. 

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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