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은 누가 뭐래도 1940~1941년이다. 이 65세의 영국인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가 없었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졌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처칠이 없었다면 영국은 결사항전의 결기를 버리고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히틀러가 배후에 평화를 확보한 채 러시아를 굴복시켰을 공산이 크다. 또한 처칠이 아니었다면 미국 역시 독일과의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쯤 대서양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거대 게르만 국가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끔찍한 비극을 막기 위해 처칠은 네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그는 유화주의 정치가들을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함으로써 타협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보수당의 엘리트들에게 법무장관, 교육장관 등의 관직을 맡겨 주변부로 보내버린 것이다. 또한 처칠은 ‘국방장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취임했다. 제각기 운영되던 전쟁부, 해군부, 공군부는 하나로 통합시켜 이후 수많은 상륙작전을 수행할 역량을 갖추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처칠은 총동원령을 내려 국가를 요새화시켰다. 공장들은 하루 24시간 무기와 군수품을 생산했고, 수출은 금지되었으며, 모든 외환이 무기 구매에 사용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경제적으로 파산에 이르렀지만 완전무장한 29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칠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외무부와 의회를 배제한 채 루즈벨트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 문구를 연설문만큼이나 공들여 작성했다. 히틀러가 영국 함대를 차지한다면 미국의 동부 해안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에 루즈벨트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칠은 그야말로 영국의 물리적 생존, 경제적 생존, 그리고 제국으로서의 생존 기반을 걸고 총력전을 펼쳤다. 이러한 과감함과 결단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뿌리는 바로 반동적 기질이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처칠은 어려서부터 반항아로 유명했다. 일곱 살에 엄격한 기숙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할 때까지 배움을 거부하며 매질을 당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불행한 낙제생은 스물다섯 되던 해 보어 전쟁에서 영웅이 되며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그는 선거에 출마해 보수당 의원에 당선되지만, 머지않아 자유당으로 적을 옮기는 위험천만한 변절을 저지른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해군장관의 자리에 오르지만 곧 무리한 군사적 모험을 감행한 나머지 해임에 가까운 사임을 하고 만다. 그 뒤에도 처칠은 수많은 무리수를 두며 부침을 거듭했다. 

처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볼셰비키들을 똑같이 취급하며 끔찍이 증오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과 사회민주주의의 부상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을 동화시킬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내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의 처칠은 사실상 파시스트였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히틀러와 처칠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두 사람은 전쟁을 위해 태어났고 전쟁을 사랑했다. 둘째, 두 사람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었다. 셋째,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극단적이었다. 남들이 활개를 펴는 지역에서는 쇠약해지고, 남들이 숨을 헐떡이는 곳에서 비로소 되살아났다. 처칠과 히틀러는 서로의 운명이었다.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승리했을 것이고, 히틀러가 없었다면 처칠은 빛나는 실패자로 시들어 갔을 것이다.

처칠의 전임자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상대로 유화정책을 펼쳤다는 이유로 줄곧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재무장관을 지낸 그는 영국이 1차 세계대전 중 모든 예비비를 소진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굳이 독일의 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독일의 요구를 조금씩 수용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좋은 방안이 아닌가. 게다가 히틀러가 영토 확장을 노린다고 해도 그 적수는 러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영국은 독일-러시아 전쟁이 마무리될 즈음 심판관으로 등장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체임벌린이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 변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히틀러였다. 만약 히틀러가 독일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계산하는 정치가였다면 체임벌린의 정책은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은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 유대인 절멸과 슬라브인의 노예화, 그리고 새로운 게르만 제국의 건설을 위해 그는 끝까지 폭주했다. 그리고 처칠은 이러한 히틀러의 본질을 정확하게 읽고 대응했다. 

문뜩 시선이 한반도를 향한다. 점점 대결과 긴장으로 치닫는 국제정세. 비합리적 언행을 보이는 지도자들. 이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처칠의 외통수? 아니면 체임벌린의 협상책? 과연 처칠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 우리는 용인할 수 있을까? 현명한 한 걸음 한 걸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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