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논란 빚은 역대 수상자들
자격 논란 빚은 역대 수상자들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9.10.15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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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은 인터넷 과학신문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 보기)

 

수차례의 투옥과 가택연금을 거치며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끈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의 군부 독재를 종식시킨 세계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그는 군부 독재에 비폭력 저항을 하던 당시인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수년전부터 아웅산 수치의 노벨상을 철회해야 한다는 청원 운동에 수십만 명이 서명했다. 캐나다에서는 그의 캐나다 국적을 박탈해야 한다는 시위가 일었으며,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도 수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은 바로 로힝야족 인종청소 사태 때문이다. 미얀마군과 로힝야족 무장세력 간 사상 최악의 유혈 충돌로 사망자와 난민이 속출하는 데도 수치는 방관으로 일관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은 때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의 즉각 중단을 촉구하는 공식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직접 경고까지 했으나 수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자격 논란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1978년 7월 25일 영국 올드햄 종합병원에서 태어난 루이스 브라운은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였다. 당시 9년 동안이나 아기가 생기지 않았던 브라운의 부모는 올드햄병원의 산부인과 의사 패트릭 스텝토를 찾았다.

복강경 수술 전문가였던 스텝토는 케임브리즈대학의 생리학자인 로버트 에드워즈와 함께 인간의 체외수정을 연구 중이었는데, 마침내 그들 부부를 대상으로 시험관 아기 기술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에드워즈는 201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선정 결과가 공표되자마자 로마 카톨릭의 생명학술원에서는 완전히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신이 부여한 수백만 개의 난자가 버려진다는 게 이유였다. 첫 시험관 아기 탄생 이후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500만 명 이상의 시험관 아기가 출생했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수많은 불임 부부의 고통을 해결한 최고의 과학이란 찬사를 받지만, 반면에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자연을 조작하는 행위라는 거센 비난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노벨상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분야는 단연 평화상이다. 1973년 노벨 평화상은 베트남전 휴전 회담을 하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공산당 정치국원 레둑토에게도 돌아갔다. 1968년 베트남 화평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에서 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레둑토는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고, 시상식장 인근에서는 키신저의 수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결국 키신저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평화상은 ‘타임’지가 선정한 노벨상 10대 논란거리에 포함됐다.

키신저에 대한 수상 반대는 캄보디아 등에서 행한 여러 차례의 비밀 군사작전을 그가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의 지시로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에 행해진 대규모 폭격 작전은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킬링필드 학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미군 철수 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공할 경우 강력하게 응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북베트남에 의해 베트남은 통일되었으며, 키신저와 레둑토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미국의 정치인 코델 헐은 제2차 세계대전의 수습과 전후의 세계 질서 유지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국제연합(UN) 설립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4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수상자로 선정되자마자 그의 평화상 수상 자격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1939년 6월에 일어난 ‘세인트루이스 호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 폭도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의 유대계 상점들을 약탈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는 등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의 공포를 피해 국외로 망명했다. 그때만 해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라 비자만 있으면 독일을 떠날 수 있었다.

독일 함부르크 항을 출발한 세인트루이스 호에는 같은 사연을 지닌 유대인 915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이 배는 쿠바에서 입국을 거부당한 뒤 마이애미 항구로 갔으나 미국도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어서 들른 캐나다에서도 쫓겨난 그들은 결국 유럽으로 되돌아갔다가 그중 1/4인 254명이 홀로코스트로 죽었다.

미국이 그들의 입국을 거부한 이유는 유대인 난민을 가장한 나치 간첩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거기에 가장 앞장선 이가 바로 코델 헐이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그는 난민을 수용하려고 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만약 수용할 시에는 자신의 정치 세력과 함께 차기 선거의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건과 로힝야족 사태는 묘하게 닮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슬람교도 이민족인 로힝야족은 불교도가 다수인 미얀마에서 박해를 받아 수년 전부터 탈출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들을 태운 보트가 안다만 해를 떠돌았으나, 당시 이웃 국가들은 모두 외면했다. 또한 로힝야족이 미얀마의 특정 지역에 갇혀 살았다는 점도 나치 치하의 유대인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로힝야족에 대한 이 같은 차별은 미얀마의 군부 독재 종식 이후 민주화 개혁이 추진되었을 때 더욱 심각해졌다. 하지만 미얀마 인권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는 당시에도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서만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아웅산 수치의 노벨상 철회 운동에 대해 2018년노벨상위원회는 불가 판정을 내렸다. 노벨재단 규칙에 의하면 수상자 결정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으며 수상자의 자격 철회 가능성도 부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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