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산맥을 향하여 캐나다 밴쿠버에서 밴프국립공원까지 1,200km가 넘는 길을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남동중심을 가로지르는 코키할라 하이웨이를 따라 달린다. 비행기 제조업체 봄바디어가 지난달 출시한 대형관광버스 프리보를 모는 기사는 졸음을 이기려고 계속 손가락 끝을 핸들에 톡톡 두드리고, 창밖으로는 놓쳐서는 안 될 장관이 끝없이 이어진다. 가이드는 “여러분은 지금 신들의 정원에 들어오셨다”는 레토릭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 일정을 한참 소개하던 그가 무슨 말 끝에 이런 말을 했다. “인생에는 많은 초이스(choice)가 있습니다.” 

그의 말이 의식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여행가이드의 말 치고는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이었다. 되도록이면 파장이 일지 않는 나날을 맞으려했던 요 몇 년의 생활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인 ‘초이스’라는 말이 여행길에서 나온 거였다. 누구에게든지 삶은 얼마나 많은 기회 속으로 지나가던가. “이번 여행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터치(touch)를 남기시기를 기원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계속 마음언저리를 노크했다.   

하루를 꼬박 굶었다. 전날 새벽 L.A.공항에서 먹은 샐러드와 빵이 문제를 일으켰다. 배가 아프고 물만 먹어도 복부가 팽팽해져왔다. 여행 중 몸이 불편하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전날 점심, 저녁과 아침식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심신은 상쾌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마다 가문비나무, 삼나무, 전나무가 가득 찬 타이가지대, 그 사이로 노란 단풍을 달고 들어서 자작나무가 영혼을 맑게 한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진초록의 침엽수와 노란 자작나무들. 그 평온한 색감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마음속으로 해발 2,000m 고지의 침엽수림의 바람이 불어온다. 정신이 서늘하고 몸은 더없이 가볍다. 독특한 경험이다. 하루를 굶었는데도 오히려 가벼운 나는 그만큼 무거웠던 것일까?

전원도시 메릿을 지나고 목재의 도시인 캠룹스를 경유해 세 개의 산이 만들어낸다는 호수 옆의 스리 밸리레이크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여정을 계속한다. 차가 빙하국립공원 입구에 멈추자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압도할만한 위용을 자랑하는 산악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가이드는 “이런 풍경은 축에도 못 낍니다. 사진은 밴프국립공원에 들어가서 찍으세요.”라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히든카드를 숨겨놓은 갬블러의 표정이다.  

밴프로 가는 길은 본격적인 산악의 아름다움을 펼쳐낸다. 가이드의 말이 시(詩)로 변한다. “때로는 인간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정령들의 땅인 이곳 자연에 온전히 마음을 맡겨보십시오. 오늘 하루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바로 여기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산은 경이로운 풍경을 스쳐지나간다. 요호국립공원의 에메랄드 호수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다. 서울에서 점심을 먹은 후 함께 차를 마시던 사람과 시간들이 생각난다.  

수천년 강물의 흐름이 바위를 뚫고 흐른다는 내추럴브리지를 지나 레이크루이스로 가는 길에서 가이드의 시가 이어진다. “정령들의 땅, 영혼들의 산악이 만드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지금 이 소리와 풍경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가슴에 담아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 년 열두 달 중 10개월간 눈에 덮여있지만 자연의 작은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는 모두 학습을 통하여 살아남고 존재합니다. 자연은 학습 그 자체입니다.”

로키산맥은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 미국 뉴멕시코 주까지 약 4,800㎞에 걸쳐 이어진 산맥으로, 이중 캐나다 로키산맥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중북부에서 약 1,800㎞ 남동쪽으로 뻗어있다. 고원지대와 설산, 빙하, 호수, 침엽수 삼림지대 등 다양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캐나다 대표 볼거리다. 로키 산맥 공원에는 캐나다 최초 국립 공원인 밴프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재스퍼 국립공원, 쿠트니 국립공원, 요호 국립공원, 마운트 롭슨 주립공원, 아시니보인 주립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캐나다 로키의 여왕으로 꼽히는 레이크 루이스가 나타난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10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호수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면서 따라온 빙퇴석이 강물을 막아 생긴 호수라고 한다. 5km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청록색 호수와 뒤편의 설산, 그리고 빽빽이 솟은 침엽수의 향기에 취한다. 문득 선댄스(sundance)라는 말이 생각난다. 북미지역에 사는 인디언들이 1년에 한 번 태양 아래서 춤추며 제사지내던 의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는 인디언들은 하늘을 찬양하며 춤추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캐나다는 인디언들에게 자행한 폭압의 역사를 반성하기 위해 미국보다 훨씬 더 진심을 담은 회개의 역사를 기록해 온 나라다. 이제 캐나다정부는 인디언들의 치유를 위한 선댄스문화제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차는 세계 최고의 산악도로 중 하나로 꼽히는 로키산맥의 ‘아이스필즈 파크웨이’(Icefields Parkway)를 달린다. 약 230㎞에 이르는 산악도로는 대륙분수계를 따라 재스퍼 국립공원과 밴프 국립공원를 가로지른다.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풍광이 계속 이어진다. 사진기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마음속에 담아야 합니다. 9월말이지만 벌써 차량이 통제되기 시작한다. 1940년에 완공된 이 스펙터클한 산악도로는 연중 통행이 가능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상당 구간의 도로가 폐쇄된다. 공원 출입구에 차량들이 늘어선다. 안내요원과 방문객의 대화가 5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안전을 위해 각종 도로정보를 주고받는 것이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나누는 수인사가 겹겹이 곁들여져 시간이 지체된다. ‘빨리빨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통행법이다. 드디어 캐나다 입국 4일 만에 아사바스카 빙하와 콜럼비아 아이스필드에 이른다. 

“오늘밤부터 폭설이 내린다고 합니다. 여기는 연중 5개월 정도만 열리는 길인데, 오늘이 올해의 입장허가 마지막 날일 듯합니다. 태초의 지구, 신들의 정원에 오신 여러분들은 빙하의 바다 위를 산책하시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세계 최고의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발견하시기를 기대합니다.”

해발 3750m 콜럼비아 빙원에서 흘러내린 아사바스카 빙하의 물은 세 개의 큰 강인 서스캐츠원, 콜럼비아, 아사바스카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1844년 아사바스카 빙하가 최고치에 도달했을 때보다 이산화탄소배출과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현재 얼음의 가장자리가 1.5km 이상이나 후퇴했다고 한다. 빙하가 현재의 속도로 계속 후퇴하면 백년 후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빙하에 틈이 생긴 크레바스에 빠져 수백미터의 층을 이룬 눈 얼음과 그 아래로 흐르는 강으로 추락하면 구조가 불가능해진다.

주차장에서 빙하 위를 달리는 설상차로 실어나르는 차에 오른다. 빙하가 시작되기 직전의 왼쪽 능선에 블랙스프러스라는 작은 흑가문비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저 나무들을 주목해 주십시오. 로키산맥의 해발 2,200미터 지대는 식물이 성장할 수 없는 수목한계선입니다. 폭풍같은 바람과 매서운 추위로 보통의 나무들은 자랄 수 없는 선입니다. 그러나 저 블랙스프러스는 수목한계선 위에 사는 유일한 나무로 ‘무릎 꿇은 나무’로 불립니다. 워낙 세찬 바람이 불어서 반듯하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것처럼 구부정하게 옆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무릎을 꿇고 엎드린 나무들의 수령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저 나무들은 최소한 400년 이상 된 나무들입니다.” 가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창문 밖으로 작은 나무들을 향해 그리운 듯한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저 무릎 꿇은 나무들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나무의 재질이 어느 나무보다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고통은 자세를 낮아지게 하고, 재질을 단단하게 합니다. 우리의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저 흑가문비 나무에 대해 이야기해 줍시다.” 가이드의 시는 어느새 웅변으로 변하고 있었다.   

특별 제작한 설상차로 이동해 빙하의 한 가운데서 내렸다. 얼음 알갱이가 섞여 불어오는 바람이 따가워 바람이 불어오는 쪽 방향으로는 설 수가 없었다. 까마귀발톱(crowfoot) 빙벽산은 세 개의 까마귀발톱 형상 중 하나를 온난화로 잃어버리고, 두 개의 발톱으로 의연히 솟아있었다.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처럼 서울에 있는 대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 몇 년간 뼈 빠지게 모은 돈을 전부 투자했지만 쫄딱 망했습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버리고 부디 행복한 삶을 찾아가라고. 그런데 아내가 북쪽으로 들어오는 저를 아무 말 없이 쫄쫄 따라왔습니다.”

자신의 아픈 역사를 말하며 그는 왜 알래스카 한대 산림에서 들불이 많이 나는지를 이야기했다. “한대산림의 우점종(優占種)인 흑가문비 나무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한 유일한 식생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세월이 지날수록 밑동의 가지가 말라가고, 씨앗이 들어있는 솔방울 더미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불이 나면 멀리 날아갈 최적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연간 강우량이 400mm 전후인 알래스카 기후는 사막성 기후와 비슷한데다 습도가 건조해 저녁이 되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구름이 자주 형성된다고 한다. 번개로 불씨가 번지면 솔방울은 불의 영향으로 스스로 벌어져 씨앗이 멀리까지 날아가 새 생명을 낳는다. 생태학적 재생(re-generation)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에 탄 산림은 영양분이 풍부한 천연비료가 되고, 어미 흑가문비 나무는 제 몸을 불살라 희생한 다음 후 세대에게 생명을 전한다. “숫거미의 희생도, 어미 연어의 산란 후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본 한국여성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자손번성을 위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 어머니들은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는 노래 한 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저 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삶의 그리움/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네 / 함께 답새라 아- 끝없는 새하얀 사슬소리여”

안치환의 노래 ‘새’였다. 감동적이었다.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우리 아이들의 잘못된 것이나 주위 사람들의 못된 것을 고치고 깨우치게 해서라도 바르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다. 먼저, 나는 내 못된 것을 고치고 벼러 제대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차장에는 3,491m라고 빙하의 고도를 표시하는 팻말이 서 있었다. ‘새’를 부르는 학사장교 출신의 가이드 윤용집 씨. 그는 얼마나 날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남의 땅, 남의 하늘 아래서.

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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