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의 감옥에 갇히다 -우계又溪* 형에게
다시 시의 감옥에 갇히다 -우계又溪* 형에게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10.1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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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주, 시화호
박성주, 시화호

 

시의 감옥에서 탈옥했지만
담장은 한 치나 두 치쯤
별것 아니게 도망할 만했다네.

그것도 탈옥수라고 
이름도 바꾸고 변장도 하고
시詩를 보면 조금은 불안해 하며
숨어 다녔다네.

세월이 흘러 
나도 내가 지은 죄를 잊을 때쯤
공소시효가 지났겠다 싶었는데,

어느 날인가 도서관 서가에
내 앳된 얼굴이 아직도 지명수배자로 
떡하니 있지 않았겠나.
깜짝 놀랐지.

이렇게 사는 게 좀 피곤도 하고
자수를 하면 선처를 해 준다기에
스스로 탈옥한 시의 감옥으로 찾아갔는데,

우계 형이
엉뚱하게 간수가 되어
시의 수의囚衣를 나에게 입혔다네.

 

‘(전략) 성숙의 기간이 지나가고 더 이상 피할 수 없어서 어느 날 글을 쓰게 되기까지 필요한 십 년, 아니 이십 년을 아까워하지 말라. 당신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당신이 글을 쓰는 일에 건강과 행복 전부를 바치지 않는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신이 할 일을 하지 않고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다면 행복하거나 병이 드는 게 일 년 아니 백 년 후에 무슨 대수겠는가? 전부를 바쳐라. 명심하라! 온 힘을 다해, 조건 없이, 마음껏 주어라. 전부를 받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 임무이니 오직 그렇게 하는 길만이 순리일 것이다.’ (『하늘과 땅』 (온 힘을 다해, 265쪽), 산도르 마라이, 김인순 옮김, 솔출판사, 2018)

오랫동안 시 쓰는 것에 대해 무기력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내가 쓰지 않아도 시 쓰는 사람이 많은데 하는 회의가 든 적도 있었지요. 영영 시를 쓰지 못할 거라는 절망에 허덕이기도 했었지요. 

어느 날 우계 형이 시집 『백묵을 던지고』을 보내왔습니다. 이 시집은 정수리를 내리치는 죽비였지요. 이상하게 그날부터 쓰는 것에 대한 무기력과 회의와 절망을 조금씩 이겨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게지요.

‘우계 형이 / 엉뚱하게 간수가 되어 / 시의 수의囚衣를 나에게 입혔다네.’

우계 형 덕분에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시의 감옥을 스스로 찾았습니다. 그날 나는 귀중한 시의 멘토를 만난 게지요.

*홍우계(洪又溪, 본명은 홍흥기, 1956~,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대한민국 시인이다.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玉가라지』,『마당에 뒹구는 반달』, 『가라앉는 섬』,『바보꿀벌』,『백묵을 던지고』등이 있음)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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