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단체가 22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정부와 농업인단체 간 간담회에서 'WTO 개도국 포기 방침 철회' 피켓을 들고 정부에 농업인단체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농업인단체가 22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정부와 농업인단체 간 간담회에서 'WTO 개도국 포기 방침 철회' 피켓을 들고 정부에 농업인단체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로드]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여부를 결정할 시한이 임박한 가운데, 국내 농업시장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농가의 반발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26일(현지시간) 한국·멕시코·중국 등 경제 발전도가 높은 국가들이 여전히 WTO 내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며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WTO가 90일 내 실질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하면 미국 단독으로 해당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23일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마감시한이다.

정부는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검토하고 있으나 농업인들의 반발이 거세다. 지난 22일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 주재로 열린 농업계 간담회에서는 참석한 농업인 단체 대표들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이미 깨졌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 개도국 지위, 농업인들이 민감한 이유는?

농업인들이 개도국 지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개도국 특혜를 적용받지 못할 경우 국내 농업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WTO는 개도국에 대해 약 150개의 우대 조항을 적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WTO 규정 이행기간을 연장하고 관세·보조금 감축 폭을 줄여주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특히, 농업 분야의 경우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의무 차이가 매우 크다. 우선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경우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대폭 감축해야 한다. 개도국의 경우 10년에 걸쳐 구간별로 약 33~47%의 관세를 감축하게 돼있지만, 선진국은 그 절반인 5년의 기간 동안 50~70%의 관세를 감축해야 한다. 전 구간에서 평균적으로 약 20%p 가량의 감축률이 차이나는 셈. 

더 큰 문제는 개도국에게만 허용되는 특별품목 혜택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현재 개도국은 농산물 전체 세번(관세율표상 분류된 상품 번호)의 12%를 특별품목으로 지정해, 해당 품목의 관세 감축률을 11%라는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특히 특별품목의 5%에 대해서는 아예 관세를 전혀 감축하지 않아도 된다. 

특별품목 혜택이 중요한 이유는 국내 농업생산이 쌀 등 특정 품목 위주로 심하게 편중돼있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2016년 농업·임업·축잠업 전체 생산액 중 상위 30개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2.8%였다. 상위 5개 품목 비중은 무려 57.8%로 전체 생산액의 절반이 넘는다. 특히, 쌀의 비중은 2016년 12.9%에서 지난해 16.0%로 상승 추세에 있다.

이처럼 소수 품목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그동안 정부는 핵심 농산물을 특별품목으로 지정해 고율의 관세 유지함으로서 국내 농업을 보호해왔다. 현재 국산 농산물의 전체 세번 수는 약 1600개로, 이중 5%인 80여개에 대해서는 관세를 전혀 깎지 않지 않을 수 있다. 농림업 생산액의 80% 가량을 약 30여개의 품목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80여개의 특별품목 지정만으로도 국내 농업을 보호하는데는 넉넉하다. 

반대로 개도국 특혜가 사라지면 핵심 농산물에 대한 보호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개도국 지위 유지 시 수입산 쌀에 대해 513%의 관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지만, 선진국으로 분류되면 쌀을 특별품목이 아닌 일반품목으로 지정해야 하기 때문에 관세가 154% 수준으로 대폭 낮아진다. 

물론 선진국도 일부 핵심 농산물을 ‘민감품목’으로 지정해 관세감축률을 3분의 1 가량 줄일 수 있다. 이 경우 약 393% 수준의 관세를 유지할 수 있지만, 해당 품목에 대한 국내 소비량의 4%를 쿼터(TRQ)로 제공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연도별 농림업 상위 품목 30개 누적 생산액. 자료=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도별 농림업 상위 품목 30개 누적 생산액. 자료=대외경제정책연구원

또다른 문제는 정부가 농가에 지급하는 농업보조금도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정 농업분야 세부원칙 4차 수정안에 따르면, 각국은 농업보조총액(AMS)을 연간 최대 1조4900억원까지 쓸 수 있다. 개도국의 경우 이를 8년에 걸쳐 70% 수준인 1조430억원까지 감축해야 하지만, 선진국은 5년 내에 55% 수준인 8195억원까지 줄여야 한다. 사실상 농가에 돌아가는 보조금이 반토막이 나는 셈이다. 

국내 농업보조금은 대부분 쌀 변동직불금 지급에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 쌀 변동직불금 예산은 1조800억원으로 이미 한도에 다다른 상황.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경우 쌀 생산 농가의 소득보전에 상당한 제약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 개도국 지위, 유지 가능할까?

현재 WTO는 개도국 지위를 판별하는 특별한 기준이나 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회원국 스스로가 판단해 개도국임을 선언하는 ‘자기 선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WTO가 개도국 지위 포기를 우리 정부에 강제할 수단은 없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가 개도국 지위 유지를 주장할 명분 또한 없다는 것. 미국은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및 가입절차 중인 국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상 고소득 국가 ▲세계상품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5% 이상인 국가 등 4가지 기준을 개도국 분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OECD 회원국 및 가입이 완료된 국가 중 WTO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 칠레, 이스라엘, 멕시코, 터키,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등 총 7개국. 이중 미국이 제시한 4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국가는 한국 뿐이다. 이처럼 한국이 개도국 서열에서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국제사회로부터 경제발전에 따른 의무 이행을 요구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개도국 논의가 사실상 중국, 인도와 같은 대형 개도국을 겨냥하고 있는 데다, 선진국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테드 요호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은 지난 6월 미 외교정책협회(AFPC)가 주관한 중국 관련 회의에서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항공모함을 5척이나 건조했고 ‘일대일로’를 통해 전 세계에서 투자하고 있다”며 “우주 개발프로그램까지 추진하고 있는 중국을 어떻게 개도국으로 볼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중국을 압박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개도국 지위만 예외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미국이 한국의 개도국 지위 유지를 용인할 경우, 중국이 이를 핑계로 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 게다가 이미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30여개국에 개도국 지위 포기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며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준비에 나선 상태다. 현재까지 대만·브라질·아랍에미리트·싱가포르 등 4개국이 미국의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오는 25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개도국 지위 포기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농가의 반발과 미국의 압력 사이에서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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