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혈청요법 창시자, 에밀 폰 베링
면역혈청요법 창시자, 에밀 폰 베링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9.10.25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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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당시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와 함께 권위적인 미생물연구소로 꼽혔던 독일의 베를린전염병연구소에 34세의 연구원 한 명이 입사했다. 그가 배속된 곳은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던 로베르트 코흐의 연구실이었다. 그 연구원은 13년 후 세계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된 에밀 폰 베링이다.

베링이 늦은 나이에 코흐 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군의학교를 졸업한 후 8년 동안 군의관으로 의무 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육군 군의관으로 그가 주로 한 일은 어 감염성 질환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코흐가 그에게 처음 맡긴 연구 과제 역시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디프테리아의 치료법이었다.

 

디프테리아균의 외독소에 의한 급성 감염 질환인 디프테리아는 특히 면역력이 약한 어린 아이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디프테리아균의 외독소는 세포 내에서의 단백 합성을 억제해 심근염을 일으키거나 신경을 마비시키는 등의 치명적인 합병증을 일으킨다. 19세기 말 독일에서만 해마다 5만명 이상의 아이들이 이 병에 감염되어 사망할 정도였다.

베링은 군의관 시절의 경험을 살려 화학요법을 첫 치료 방법으로 선택했다. 그는 설치류인 기니피그에 여러 가지 화학제재를 접종하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요오드를 투여한 실험동물 그룹이 다른 그룹에 비해 생존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요오드가 디프테리아를 약화시킨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또 하나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강력한 디프테리아균을 주사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던 동물들은 모두 이전의 실험에서 디프테리아에 한 번 걸렸다가 살아남은 동물이라는 걸 알아낸 것이다.

즉, 요오드의 효과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인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그 무엇인가가 바로 핏속에 있을 거라고 추정했다. 그는 즉시 토끼를 실험동물로 선정해 추가 실험에 돌입했다.

그는 디프테리아에 걸렸다가 완치된 토끼의 혈액에서 혈청만 분리한 후 그 혈청을 디프테리아균과 함께 다른 토끼에 투여했다. 그 결과 예상대로 그 토끼들은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지 않았다. 하지만 디프테리아에 걸리지 않은 토끼의 혈청을 디프테리아균과 함께 투여한 토끼들의 경우 모두 디프테리아에 감염됐다.

혈청이란 피를 적혈구 및 백혈구, 혈소판 등의 세포와 액체 성분인 혈장으로 분리한 다음 혈장에서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물질을 제거한 것으로서 다양한 항체들이 들어 있다. 베링은 디프테리아에 한 번 걸린 동물의 혈청 속에 존재하는 면역 물질을 ‘항독소’라 명명하고, 그에 대한 연구 내용을 1890년 12월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베링이 선택한 방법은 제너와 파스퇴르가 확립한 ‘능동면역’과 구분해 ‘수동면역’이라 불린다. 즉, 항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동면역과 달리 이미 타인의 몸에서 만들어진 항체를 제3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인 셈이다.

베링의 면역혈청요법은 논문 발표 1년 후 디프테리아에 감염된 어린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한 결과 효과를 인정받았으며 이후 상품화되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01년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가 개발한 혈청치료법은 항생제가 등장한 때로부터 반세기 전에 이룩한 결과다. 즉, 항체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혈청을 이용해 디프테리아의 감염 치료에 최초로 성공했으며, 그의 연구 덕분에 인류는 감염성 질환도 치료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링이 노벨상을 받을 당시 노벨위원회의 후보자 명단에는 그의 연구실 동료인 기타사토도 함께 올라 있었다. 베링보다 4년 먼저 코흐의 연구실에 들어와 있었던 일본인 기타사토는 파상풍균을 세계 최초로 배양한 후 파상풍에 대한 혈청요법을 이미 연구하고 있었다.

사실 베링이 디프테리아의 화학요법 연구에서 혈청요법으로 연구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도 기타사토의 영향이 컸다. 이후 이들은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이라는 병명만 다를 뿐 혈청요법에 대한 연구는 공동으로 진행했다.

어떻게 보면 기타사토가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공동수상도 아닌 베링의 단독 수상으로 결정난 것이다. 이에 대해 디프테리아가 파상풍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한 질병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기타사토가 유럽인이 아닌 동양인이었기에 상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베링은 그의 스승인 코흐보다 노벨상을 먼저 받은 제자로도 유명하다.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코흐는 탄저균과 결핵균, 콜레라균 등을 발견했다. 또한 세균의 표본 고정법, 염색법, 현미경 촬영법을 창시했으며, 결핵균에 대한 항원인 투베르쿨린을 발견하는 성과도 올렸다.

하지만 그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 주어진 것은 베링보다 4년 후인 1905년이었다. 사실 그가 발견한 투베르쿨린은 효과가 없음이 드러나 학자로서의 명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했다. 또한 코흐는 당시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젊은 여배우와 결혼하는 등의 개인적 스캔들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에 비해 베링은 독일의 정치가 및 재계 등의 유력자들과 가깝게 지내며 많은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이 같은 그의 정치적 행보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세균학자이자 스승인 코흐를 제치고 최초의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다.

베링은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연구와 교육 등 과학자로서의 행보를 계속했으며 191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베링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는 인류를 디프테리아의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연구소를 세운 지 4년 후 베링은 마르부르크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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