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하며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래픽=연합뉴스
지난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하며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래픽=연합뉴스

[뉴스로드] 소비자물가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하며 역대 최초로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했다. 8월 상승률이 공식 통계 상에서는 0.0%지만 실제로는 –0.038%였음을 고려하면 2개월 연속으로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셈. 

최근 한국의 저물가 기조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30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국가별 소비자물가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OECD 회원국 및 가입예정국 등 총 40개국 중 가장 낮았다. 지난달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OECD 소속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그리스(-0.1%), 포르투갈(-0.1%) 등 3개국에 불과하다.

이처럼 저물가 흐름이 지속되자 일각에서는 경기부진에 따른 디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의 저물가는 일시적인 공급 측 요인에 의한 현상이라며 이를 디플레이션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도 현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일각에서는 수요측 요인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소비자물가상승률 추이. 자료=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 등락률 추이. 자료=통계청

◇ 기재부 "디플레이션 현실화 가능성 낮아"

기획재정부는 지난 29일 디플레이션 논란에 대해 “디플레이션은 일반적으로 물가수준의 하락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현상으로, 상품 및 서비스 가격하락과 함께 경기침체가 동반해서 나타난다”며 “지금 우리나라 물가 상황은 ‘디플레이션’으로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비교하면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것.

한국은행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주요국 물가하락기의 특징’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 하락은 이미 많은 국가에서 적지 않은 빈도로 나타났으며, 대부분의 경우 단기간 내에 상승으로 전환됐다. 물가지수 전반의 지속적인 하락(디플레이션)의 경우 일본 등 일부 국가에 국한된 현상으로, 대부분 자산가격 조정이 수반됐다. 반면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달리 주식·부동산 등의 자산가격 조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디플레이션의 전조가 아니라면 최근 저물가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기재부는 “작황이 좋았던 농산물가격 하락과 유류세 인하에 따른 석유류 상품가격 하락” 등 일시적인 공급 측 요인을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의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실제 지난해 9월 농산물 가격은 폭염으로 작황이 나빠 14.9% 상승했으나, 올해 9월에는 풍작으로 인해 13.8% 하락했다. 석유류 가격 또한 지난해 9월 77달러에서 올해 9월 51달러로 떨어졌다. 기재부는 두 가지 품목이 소비자물가상승률 하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정책요인 또한 저물가의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달 들어 고교 납입금 -36.2%, 학교급식비 -57.8%, 병원검사료 -10.3%, 보육시설이용료 –4.3% 등 정부 정책에 따른 복지서비스 가격이크게 하락했다. 

기재부는 또한 ▲지난해 9월, 10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이례적으로 높아, 올해 하락세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 ▲농산물, 석유류 등 물가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하고 산출하는 ‘근원물가’가 연초부터 1% 내외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디플레이션 우려는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한국은행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농축수산물가격의 일시적 기저효과 등으로 크게 낮아졌으나 연말경에는 이러한효과가 사라지면서 반등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가별 물가하락 지속기간 및 가격하락 품목 비중. 자료=한국은행
국가별 물가하락 지속기간 및 가격하락 품목 비중. 자료=한국은행

◇ KDI, 수요 측 요인 배제할 수 없어

반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기재부와는 조금 다른 진단을 내놨다. 현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최근의 저물가를 단순히 일시적 공급 측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도 힘들다는 것.

KDI 정규철 연구위원은 29일 발표한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에 대한평가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최근의 저물가 현상과 관련해 수요 측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9월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의 경우 일시적인 공급 측 요인의 영향이 커 디플레이션의 징후로 보기 어렵지만, 올해 1~9월의 전반적인 물가상승률 하락세는 수요 위축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공급 충격이 저물가를 주도한 경우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이 반대 방향으로, 수요 충격이 주도한 경우에는 같은 방향으로 각각 변동한다. 경제상승률과 물가상승률이 동반 하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저물가는 수요 측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정 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주요 공급 충격인 날씨나 유가 등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식료품과 에너지는 물가상승률 하락에 ­0.2%p 기여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상품(-0.3%p)과 서비스(­0.4%p)도 물가상승률 하락에 상당 부분을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 위원은 이어, 복지정책이나 특정 품목의 급격한 가격 하락이 저물가를 주도했다는 기재부의 설명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정 위원은 “정부 복지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이 배제된 민간소비 디플레이터 상승률(2019년 상반기)은 0.5%로 축소되었으며, 생산자물가 상승률(2019년 1~9월)도 0.0%에 그쳤다”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평균값(0.4%)과 함께 중간값(0.3%)도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고있어, 물가상승률 하락이 특정 품목의 극단치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정 품목 가격하락과 복지정책 보다는 다수 품목의 전반적인 가격하락이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실질금리 및 소비자물가, 경기동향지수 추이. 자료=한국개발연구원(KDI)
실질금리 및 소비자물가상승률, 경기동행지수 추이. 자료=한국개발연구원(KDI)

◇ 저물가 대응, 상수는 통화정책

정 위원은 올해 저물가 흐름을 바로잡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정 위원은 “물가상승률의 장기적 추세는 통화정책 운용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며 “화폐 대비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인 물가는 통화당국이 통화량 조절을 통해 장기적인 상승세를 결정할 수 있는 변수다. 세계화, 인구구조, 산업구조 등 경제구조가 변하더라도, 이에 대응하여 통화정책을 수행한다면 장기적인 물가상승률은 안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내 통화정책 운용체계가 ‘물가안정’보다 ‘금융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저물가에 대응하는데 구조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 정 위원은 지난 2011년 말 시행된 한국은행법 1조 2항(한국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이 동법 6조 3항 (한국은행은 ...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와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 2017년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 및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실질금리는 오히려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근원물가 상승률 또한 물가안정목표치보다 낮은 1% 내외에서 정체된 상황이었으나, 통화당국은 가계부채 급증을 이유로 지난해 말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한 바 있다. 

정 위원은 “물가안정은 통화정책 이외의 정책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통화정책이 물가안정을 중심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전반적인 체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향후 통화정책이 물가안정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 수행된다면, 디플레이션 발생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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