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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 선정과 관련해 가끔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주어진 1944년 노벨 화학상이다. 노벨상위원회가 핵분열 현상을 최초로 올바르게 인식하고 기술한 리제 마이트너를 제외한 채 오토 한에게만 상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핵 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원소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등 오토 한을 도와 대부분의 분석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프리츠 슈트라스만 역시 수상자에서 제외됐다. 오토 한은 수상 연설에서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이 기여한 바를 언급했으며, 상금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왜 오토 한만이 상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변호사의 셋째 딸로 태어난 마이트너는 루트비히 볼츠만이 교수로 있던 빈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볼츠만 교수 연구실에서 알파선 등의 연구에 몰두했던 그녀는 스승이 우울증으로 자살하자 베를린대학의 막스 플랑크 연구실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그 대학의 심포지엄에서 함께 작업할 물리학자를 찾고 있던 오토 한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유기화학을 전공한 오토 한은 월리엄 램지 교수 밑에서 방사토륨을 발견한 일을 계기로 방사화학 분야에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었다.

베를린대학의 에밀 피셔 교수 밑에 있던 오토 한은 1912년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가 설립되자 화학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마이트너에게 그 연구소로 함께 가자고 권유하여 계속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새로운 방사성동위원소를 여러 개 발견하는 등 둘의 공동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둘은 잠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마이트너는 빈으로 돌아가 야전군 병원의 X선과 간호원으로 투입되었으며, 역시 군에 징집된 오토 한은 프리츠 하버 밑에서 독가스에 관한 연구를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다시 긴밀한 공동작업을 해나갔다. 오토 한은 1928년에 카이저-빌헬름 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비슷한 무렵에 마이트너도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마이트너의 제안으로 둘은 1934년부터 중성자를 이용해서 우라늄을 변환시키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의 실험은 젊은 화학자 슈트라스만까지 가세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성공을 앞두고 또 다시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면서 마이트너가 국적을 상실하게 된 것.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녀는 오토 한과의 공동연구를 포기하고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그동안 오토 한은 슈트라스만과 함께 실험을 계속 진행하던 중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했다. 초우라늄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운반체로 사용했던 바륨과 란탄이 방사성 원소로 변해버린 것이다.

우라늄은 자연붕괴를 하여 초우라늄 원소로 변환되거나 토륨, 라듐 등과 같은 원소로의 변화를 거쳐 방사성 원소로서의 일생을 마친다. 때문에 원자핵에 변환이 얼어난다 해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지, 절반으로 쪼개져 바륨과 란탄으로 변화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 같은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오토 한은 스웨덴에 있는 마이트너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침 조카 오토 프리쉬와 함께 지내던 마이트너는 답장을 통해 우라늄 핵이 분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답장을 받은 오토 한은 슈트라스만과 함께 추가 실험을 실시해 우라늄의 핵분열을 증명했으며, 그 논문은 1938년 12월 ‘자연과학’에 게재됐다.

마이트너 역시 프리쉬와 함께 핵분열 반응의 물리적 특성을 규명한 논문을 다음해 1월 ‘네이처’에 발표했다. 거기서 마이트너는 핵분열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그 같은 사실은 프리쉬의 스승인 닐스 보어에게 알려져 미국물리학회에 보고됨으로써 마침내 원자폭탄 제조계획으로 진전됐다.

원지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오토 한은 194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당시 그는 영국의 전쟁포로였던 탓에 1945년 11월에서야 자신의 수상 사실을 알게 됐고, 그로 인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럼 왜 마이트너는 수상에서 제외됐을까. 그에 대해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성차별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사실 마이트너는 오토 한과 처음 공동연구를 할 때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오토 한의 스승인 에밀 피셔가 여성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에밀 피셔의 연구실에는 여성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마이트너 역시 오토 한의 실험실을 항상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다. 때문에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보조 연구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마이트너는 수상자 선정 이후 “오토 한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그의 보조 연구원이 아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수상 제외에 대한 또 다른 이유로는 노벨 화학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화학자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마이트너의 이론물리학적 공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토 한의 실험적 성과만 높이 평가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50년 후에 공개하는 관례에 따라 1997년에 밝혀진 당시의 심사기록도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논문이 나온 선후 관계와 논문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실의 예언이나 예측에는 상을 줄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이트너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으나 후대의 과학자들마저 그녀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1992년에 새로 발견된 초우라늄 원소는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이트너륨이라고 명명됐다. 또한 금성 분화구에도 마이트너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독일 베를린에는 오토 한-마이트너 연구소라는 이름의 핵연구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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