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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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드]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의 노동·환경 관련 조항 이행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패널이 구성됐다. 특히, 이들은 한국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20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이번 전문가 패널 활동은 EU의 요청으로 시작됐으며, 12월 30일부터 90일간 양국 정부, 시민사회 자문단,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결과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전문가 패널은 양국 패널 각 1인과 제3국 의장 1인 등 총 3명으로 구성된다. EU 측은 로랑 브와송 드 샤주네 스위스 제네바대 교수를, 한국은 이재민 서울대 교수를 패널로 선정했다. 의장은 한-EU 협의 하에 토마스 피난스키 변호사(미국)이 선정됐다.

앞서 EU는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력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지난해 12월 분쟁 해결을 위한 첫 절차로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협의가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되면서 EU는 올해 7월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했다.

정부는 지난 5월 ILO 핵심협약 중 29·87·98호 등 3개 협약의 비준안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반발이 심해 국회 통과는 요원한 실정이다. 

한-EU 자유무역협정문 중 일부. 자료=산업통상자원부
한-EU 자유무역협정문 중 일부. 자료=산업통상자원부

◇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ILO 핵심협약 4개, 내용은?

한-EU FTA 협정문 13장 ‘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협력’은 양 측이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및 그 밖의 협약과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다자간 환경협정의 비준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ILO 핵심협약 비준 여부는 한-EU FTA의 노동조항 위반 여부와 직접 연관돼있다.

한국은 지난 1991 ILO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해 1996년 정이사국으로 선출된 뒤 23년째 이사국을 맡고 있다. 하지만 ILO 핵심협약 8개 중 결사의 자유에 관한 87호·98호 협약과 강제노동에 관한 29호·105호 협약은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결사의 자유 관련 조항은 노동자가 자유롭게 단체를 설립하고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 그리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명시하고 있다. 강제노동 관련 조항은 불법적인 노동 강요를 금지하고 국가가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규정했다. 

현재 ILO 187개 회원국 중 76%가 8개 협약을 모두 비준했으며, 85%가 7개 이상을 비준했다. OECD 36개 회원국 중에서는 31개국이 8개 협약을 모두 비준했으며, 미국(2개)을 제외하면 모두 비준한 협약 수가 한국보다 많다. 특히, 결사의 자유 및 강제노동 관련 4개 조항을 모두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마샬제도·팔라우·통가·투발루 등 6개뿐이다. 

자료=문화체육관광부
국제노동기구(ILO) 회원국의 4개 핵심협약 비준 현황 자료=문화체육관광부

◇ 전문가 패널 판단에 따라, EU·미국·캐나다서 무역제재 가능성

만약 전문가 패널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한-EU FTA를 위반한 것으로 인정돼 무역제재를 받을 수 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하지 않는 것은 노동조건을 낮게 유지해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 4월 발표한 “국제통상과 노동기준의 연계: 한-EU FTA 노동조항 관련 분쟁의 맥락”이라는 글에서 “한-EU FTA 제13장에 직접 근거한 특혜관세 철폐 등의 무역제재는 불가능하다”면서도 “그러나 노동문제를 통상 관련 협상에서 지렛대로 삼는 등 사실상의 ‘제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적 차원의 제재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남 위원은 “EU 혹은 EU 회원국은 독자적인 법적 근거를 마련해 일정한 노동권·노동기준을 준수하지 않는 작업장·기업에서 생산된 상품·서비스에 경제적 불이익을 줄 수 있다”며 “이때 FTA 노동조항의 지속적 위반은 위 제도의 노동 관련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간접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 위원은 이어 EU가 한국에 대해 관세 및 수출입 수량 제한을 비롯해 조세, 규제, 공공조달, 기업보조금 제도 등의 영역에서 불이익을 주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한-EU 노동조항 위반과 제재는 무관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정적인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태가 EU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과의 FTA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지난 7월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적 쟁점 토론회’에서 “한-EU FTA 노동기준이 한-미, 한-캐나다 FTA와 동일하다”며 “만약 전문가 패널이 FTA 위반을 인정하게 되면 미국과 캐나다도 우리나라가 FTA를 위반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 한-미 및 한-캐나다 FTA는 한-EU FTA와 달리 노동조항과 관련된 협정 위반을 근거로 관세혜택 철회 및 벌과금 부과 등 무역제재가 가능하다. 남 위원은 “한-미 FTA는 소정 협의절차를 모두 거치고, 소집된 중재패널에 의해 노동조항 위반이 확인된 후에도 패소국이 패널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의무이행을 하지 않을 경우, 승소국이 관세 혜택을 철회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부 연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료=한국노동연구원
자료=한국노동연구원

◇ 정부,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적극 설명할 것”

전문가 패널은 활동 개시일(12월 30일)부터 90일 내 권고 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채택해야 한다. 노사 단체 및 개인은 내년 1월 10일까지 전문가 패널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전문가 패널보고서가 채택되면 한-EU 정부 간 협의체인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위원회’에서 권고사항 이행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한편, 고용부 관계자는 “자유무역협정 제13장에 규정된 바에 따라 우리가 ILO 기본권 선언의 정신을 국내 체계에 반영·증진시켜 왔다는 점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는 점을 적극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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