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아베 신조라는 인물에 호감을 갖기란 쉽지 않다. 외려 그에 대한 감정은 극렬한 반감에 가까워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아베가 하루빨리 퇴장하기만을 소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걸핏하면 망언을 일삼는 극우적 사고. 강자에게 굽실대고 약자에게 큰소리치리는 파렴치한 외교. 잊을 만하면 터지는 각종 스캔들. 한국 언론에 따르면 연일 위기를 맞아 지지율도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얼마 전 아베는 전후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갈아치웠다. 

『아베는 누구인가』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아베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목적은 다름 아닌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다. 전후체제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세분되는데, 법적으로는 1947년부터 시행된 평화헌법 체제, 국제적으로는 1952년 이후 이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 정치적으로는 1955년부터 시작된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꼽을 수 있다. 이중 아베가 사력을 다해 탈각을 시도 중인 것은 바로 평화헌법 체제다. 

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아베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에 깊숙이 관여해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 기시는 3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마치고 1948년 석방되었다. 기시가 정계에 복귀할 무렵 일본을 이끌던 총리는 바로 요시다 시게루. 전후 일본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요시다는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에 집중한다는 ‘요시다 독트린’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이 일본의 숨통을 죄기 위해 강요한 헌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그는 개헌을 위해 보수 세력을 모아 자민당을 창당하고 총리 직까지 올랐지만, 시민사회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쳐 비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2006년 일본의 9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아베 신조는 이러한 할아버지의 문제의식을 뼛속 깊숙이 공유하고 있었다. 아베는 전후 연합군이 강요한 헌법과 교육기본법 등의 족쇄를 벗어 던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뒤엎으려는 시도에 미 하원이 제동을 걸고, 측근들의 비리 의혹이 잇따라 터지며 집권 1년 만에 내각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베의 부활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베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조금씩 재기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반성 노트’를 작성하며 자신이 실패했던 원인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국민들이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바로 이것이 아베의 결론이었다. 아베는 ‘전후체제로부터 탈각’해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려도 했지만, 정작 일본 국민들이 원한 것은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 대책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아베는 ‘헌법의 아베’, ‘교육의 아베’를 넘어 ‘경제의 아베’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마침내 아베노믹스를 디딤돌 삼아 자민당 총재로 복귀하고, 이어지는 중의원 선거에서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아베는 필생의 과업인 개헌을 위해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특히 무력의 사용, 군대 보유, 교전권 등을 금지한 헌법 9조를 개정하려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중이다. 이미 1972년부터 이어진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하지만 행사할 수 없다’는 역대 정부의 헌법 해석을 변경했고,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을 통해 미일동맹을 글로벌한 성격으로 한 단계 격상시켰다. 같은 해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껍데기로 만드는 아베담화를 발표했고, 이듬해 진주만의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하며 미국과의 앙금도 뒤로 묻었다. 중국의 부상과 함께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달라졌기에, 오바마는 아베의 애매한 역사의식과 보통국가화를 추인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한·일간에는 위안부 합의와 파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 백색국가 제외 조치,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소동 등이 벌어졌다. 저자는 말한다. “현상적으로 볼 때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은 위안부 문제였지만, 그 하부구조에서 양국 관계를 불화하게 만든 것은 언제든 중국에 붙어 버릴 수 있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전략적 불신’이 아니었나 한다.”

책의 말미에 소개된 나카야마 도시히로 게이오대 교수의 인터뷰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한국은 미중의 힘의 균형 속에서 최소한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지역 안보 문제를 보는 부분이 있다. 향후 이 지역에 (예전의) 중화질서 같은 게 생겨난다면, 한국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중화질서가 이 지역에 좋지 않다고 본다. 일본이 중국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전후 이 지역의 번영을 지탱해온 (미국 중심의) 질서가 이 지역에 가장 좋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중요한 질문이 놓여 있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는 나라는 일본인가 중국인가? 만약 일본이 가장 큰 위협이라면 미국과 척을 지고라도, 죽창을 들고서라도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국이 더 큰 위협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일이 협력할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아베로 대표되는 수정주의적 역사인식을 가진 세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과연 두 선택지 중 어느 편이 한국의 전략적 이익에 가장 부합할까?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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