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가치사슬
세계화와 가치사슬
  • 임하영
  • 승인 2019.12.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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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왜 시작되었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고,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얻고 싶다면 리처드 볼드윈의 『그레이트 컨버전스』가 안성맞춤이다. 

볼드윈은 세 가지 제약조건, 즉 상품·지식·사람의 운반비용으로 세계화를 설명한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 세 가지를 움직이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무역이라는 형태로 상품이 이동하긴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여러 차례 중개인을 거친 끝에야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이동은 특히 더 위험해서 대로변 또는 공해상에서 살해되거나 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지닌 지식의 이동도 어려워서, 기원전 500년 등장한 불교가 극동까지 도달하는 데 무려 2세기가 소요되었다. 이 세 가지 제약조건이 모두 작동한 결과, 상품 생산자와 소비자는 공간적으로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에서 생산해서 동네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경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820년경 증기혁명이 발생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철도가 발전하며 경제적으로 고립되었던 내륙지역이 드디어 상행위에 개방된 것이다. 이때 상품의 원거리 수송이 가능해지면서 생산과 소비가 갈라지는 첫 번째 분리가 일어났다. 기업은 이윤을 더 많이 남기려고 생산규모를 대폭 확장해서 가동했고, 각국은 가장 경쟁력 있는 부문을 점점 더 특화하기 시작했다. 산업 집중은 혁신을 유발했고, 혁신은 경쟁력을 신장시켰으며, 경쟁력은 다시 국가 내 더 강화된 산업 집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서방 국가들은 비약적인 경제성장, 즉 ‘대분기’를 이뤄냈다. 그렇지만 아직 지식과 사람의 이동은 제약에 묶여 있었다. 전신이 발명되긴 했지만 전문지식을 옮기기에는 수준이 턱없이 부족했고, 사람들의 여행 역시 아직 느리고 위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ICT 혁명으로 지식의 이동 비용이 급격히 낮아진 것이다. 팩스, 휴대전화, 인터넷이 등장하며 지식은 디지털화되었고 실시간으로 전송 가능해졌다. 시간과 효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생산단계를 분산시키는 것이 가능해지자, 선진국 기업들은 해외이전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것이 세계화의 두 번째 분리다. 이렇듯 ICT 혁명의 효과로 상품 무역 역시 더 빨라졌지만, 여전히 사람의 이동비용은 높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생산은 분산된 반면 사람들은 도시에서 무리를 이루었다. 거리가 덜 중요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중요해졌고, 제조업의 해외이전 역시 세계적인 클러스터가 아니라 지역적인 클러스터에서 이루어졌다. 폴란드,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등 선진국에서 가까운 나라들이 선택적으로 반사이익을 누린 것이다. 이렇게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의 거의 20%가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하면서, ‘대수렴’이 일어났다. 

이러한 두 번째 분리의 가장 큰 결과는 한 국가 내에서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노동과 기업은 조금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한 팀이라고 생각했다. 경쟁은 국가 단위로 이루어졌고, 승패 역시 국가 단위로 갈렸다. 그러나 노동-지식 콤비가 해체되면서 국가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은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졌다. 지식은 노동과 달리 비경합적(nonrival)이며 두 국가에서 동시에 사용될 수 있다. 선진국의 전문지식이 개발도상국의 저숙련 노동과 만나면. 선진국-고숙련 노동자들과 개발도상국-저숙련 노동자들에게는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되거나 해외로 이전되는 선진국-저숙련 노동자들에게 이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책에서 세계화의 미래를 다소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책이 출간된 2016년 이후 우리는 수많은 반작용을 목격했다. 특히 선진국의 저숙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TPP 탈퇴, 관세 인상 등으로 이에 응답했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와 보수당 총선 승리 등으로 고립주의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작용이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 자체를 뒤엎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자는 머지않아 사람의 이동이 제약에서 벗어나는 세 번째 분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가상현실을 통해 각기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는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 멀리서도 로봇 조작을 통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텔레로보틱스(TeleRobotics) 등이 발전하면, 세계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리핀의 마닐라에 앉아 있는 가정부가 로봇 조작을 통해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호텔 방을 청소하고, 페루에 있는 보안요원이 조종하는 로봇이 미국 쇼핑몰을 지킬 수도 있다. 반대로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외과의사가 중국인 환자의 수술을 집도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시대가 온다면 노동의 경계는 더 희미해지고, 선진국 내에서의 소득 양극화는 더욱더 극심해질 것이다. 

결국 정치의 역할이 다시 한 번 중요해진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변해야 하고, 변화에는 이득 뿐 아니라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과연 정부가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 고숙련 노동자와 저숙련 노동자의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을까? 일자리가 아닌 노동자에 집중하도록 사회정책을 재설계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여 글로벌 가치사슬에 맞춤한 무역협정을 타결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는지에 따라 각국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다. 부디 한국에도 유능한 통치세력이 등장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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