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습니다
잊습니다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12.27 0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성이. Scherazade_4(페인팅)ceramic, 60x60cm
유성이. Scherazade_4(페인팅)ceramic, 60x60cm

 

잊습니다.
처음은 그리운 사람을 잊습니다.
그리고 잊습니다.
사거리의 골목과
한 움큼씩 묻어 있는 추억을 잊습니다.

꽃의 색깔과 냄새도 잊습니다.
시간이 켜켜로 쌓아놓은 추억도 
들떴던 첫사랑도
스스로에 달떴던 뜨거움도 잊습니다.

견고하게 쌓았던 지식도
가슴에 메아리를 만들던 음악도
물을 따라 만났던 바다의 환희와 탄식도
여울에 여울여울 띄워 보냈던 그리움의 연서도
이제는 잊습니다.

눈 감아도 찾을 수 있던 길도 
그 길 위의 내 발자국도
잊습니다.
다 잊습니다.

잊습니다. 다 잊고 나면
정적 같은 편안함, 편안함 같은 정적에,

잊어버린 것들이 새롭게 
샘물처럼 솟습니다.
처음의 따스한 눈물처럼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최고의 정리는 버리는 거지요. 버리지 않고 정리만 할 경우 눈에 어지럽게 보이는 걸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물건들은 다시 보이는 곳으로 등장해 집안을 지저분하게 합니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이 물건들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버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꼭 필요한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필요가 생기면 다시 구입할 요량으로 버리지 않으면 주변은 점점 더 쓰레기장처럼 변해 갑니다. 우리가 사용할 공간이 버려야 할 물건들의 서식처가 됩니다. 이 물건이 우리를 변두리로 쫓아버립니다. 우리의 무대에서 그것들이 주인공이 되고 우리는 조연이 되지요.

정리수납전문가는 설레지 않는 물건은 버리라고 합니다. 막연히 '언젠가는 쓸' 거라 생각하고 두었던 물건들은 대부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거지요. 그러니 설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안 버림과 버림의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물건만 그런 건 아닙니다. 생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에 호기심과 설렘이 없으면 삶은 피곤해지고 지루해지지요. 지루해지면 활력이 떨어지고 천근만근 무거워집니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삶이 어두워지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루한 삶은 의미를 상실한 삶이지요.

우리도 우리를 물건처럼 정리를 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물건을 버리듯이 어지러운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어리석음과 분노를 버리고 불안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새로운 마음이 깃들 공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마음이 찾아오지 않으면 마음의 설렘이 없습니다. 설렘은 새로움이 주는 떨림이기 때문입니다.

‘잊습니다. 다 잊고 나면 / 정적 같은 편안함, 편안함 같은 정적에 // 잊어버린 것들이 새롭게 / 샘물처럼 솟습니다. / 처음의 따스한 눈물처럼 /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른 해가 시작됩니다. 지난 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이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