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여름 대한민국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이 조수를 시켜 작품을 대작하고, 이를 알리지 않은 채 판매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언론은 연일 조영남의 비윤리적 행태를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고, 화가들은 신성한 예술혼이 짓밟혔다며 분노했다. 대부분의 대중들 역시 조영남의 사기행각에 분통을 터뜨렸으니, 여론에 힘입어 검찰이 그를 기소하기까지 이르렀다. 

흑과 백의 구분이 너무나 명징해보이던 이때, 유일하게 ‘그만’을 외친 사람이 있었다. 미학자 진중권은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검찰이 제정하냐고 따져 물으며 미술계 내에서 섬세한 윤리적·미학적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의 현대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 언론, 예술가들은 앞 다투어 그를 비난했다. 범죄자를 옹호하고 미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진중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학 스캔들』은 이러한 공론의 시도들을 묶어 정리한 기록이다.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저자성(authorship)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실 르네상스 때까지만 해도 아직 ‘예술’과 ‘기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화가들은 화판화 뿐 아니라 제단화, 프레스코 벽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고, 조각가들 역시 제단의 탁자, 걸상과 같이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물건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대부분 공방 단위로 이루어졌다. 전체적 디자인을 책임지는 장인이 있긴 했지만, 여러 명의 조수와 제자들이 협업하여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미켈란젤로는 여러 명의 조수들을 데리고 시스타나 천장 벽화를 작업했다. 렘브란트는 제자의 모작에 서명을 넣어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판매했다. 루벤스 역시 작업을 조수들에게 맡겼고, 조수들을 감독하는 일마저 믿을 만한 제자에게 거의 일임했다. 스튜디오에서 마치 공장처럼 ‘어셈블리라인 회화’를 찍어내던 시절, 사인은 곧 브랜드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누구의 작품이냐’ 하는 물음은 ‘실행을 누가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작품의 도덕적·법적 책임을 누가 지느냐’의 문제였다. 

본격적으로 예술과 기술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이다. 시, 회화, 음악, 조각, 무용과 같은 기술이 일상의 필요를 충족하는 실용적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인식이 싹트면서, 이들을 따로 구분해 ‘아름다운 기술(fine arts)’, 즉 ‘예술(art)’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실마리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구체제가 몰락하면서 예술의 소비층이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변화했다. 전에는 성당을 장식할 거대한 그림들을 공방 단위로 생산했다면, 이제는 부르주아 가정에 걸릴 작은 그림을 화가 개인이 맡아 그리게 되었다. 사물의 제작방식 역시 ‘주문생산’에서 ‘시장생산’으로 바뀌었다. 전에는 주문자가 작품의 제재와 형식을 사전에 지정했다면, 이제는 작가가 본인의 주관과 의도에 따라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낭만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술가들의 작업이 신화의 경지에 오른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예술가들이 점점 더 숭배될수록 친작(autograph)에 대한 집착도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1870년 인상주의자들이 빛을 찾아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가면서 친작이 점차 미술계의 관행으로 굳어졌다.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적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그림을 현장에서 완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재빨리 덧그리는 ‘알마 프리마’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인이 모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작가의 아우라(aura), 즉 신비한 영감과 고유한 터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이를 “예술에 대한 속물적 관념”이라고 비판했다. 과거에는 모든 사물이 장인이 손수 만든 원작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원본은 사라지고 세상은 온통 복제물로 가득 찼다. 또한 사진술이 발명되고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영상마저 모조리 원작에서 복제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흐름에 맞춰 전통적 예술가의 상, 전통적 작품의 개념, 전통적 창작의 관념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 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이었다.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주창하며 이러한 흐름은 정점에 도달했다. 그는 기성품을 가져다 그대로 작품으로 전시하면서 부르주아들의 보수적 미감과 수공업적 생산방식을 고수하는 예술가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레디메이드에서 작품은 제품으로 내려오고, 작가는 익명으로 사라지고, 영감은 선택과 명명으로 대체된다. 이제 예술가는 새로운 객체가 아닌, 새로운 관념을 창조한다. 뒤샹에 이르러 미술은 ‘망막적(retinal)’ 현상에서 ‘개념적’ 작업으로 바뀐다. 

이러한 아우라의 파괴는 1960년대 팝아트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궁극에 달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앤디 워홀이다. 워홀의 작품은 코카콜라, 캠벨 깡통, 메릴린 먼로 등 대중이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을 제재로 삼는다. 워홀은 예술이란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실크스크린을 통한 대량복제 방식을 도입했다. 당연히 이를 실행에 옮긴 당사자는 조수들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와 같은 현대미술의 스타들 역시 개념을 만드는 데 치중하고 물리적 실행은 대부분 조수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한국의 수많은 예술가, 평론가, 검찰 등은 이러한 현대미술의 관행이 저작권법 위반과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결론짓고 말았다. 

저자는 대중과 전문가가 모두 19세기 인상주의 시절의 낡은 예술관에 매몰되어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마냥 조영남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이다. “나 역시 조영남의 미학적 ‘나태’와 윤리적 ‘허영’과 경제적 ‘인색’을 비판한다. 창조력의 전개를 위해 작가에게 허용한 특별한 권리를,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에 지극히 편의적인 방식으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영남에게 대작의 사용을 공공연히 드러낼 것, 대작이 작업에서 갖는 미학적 필연성을 설득시킬 것, 조수들에게 위치에 걸맞은 처우를 해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우유부단한 처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다양한 영역이 겹치고 섞이는 다층적 세계에서 예술 고유의 영토를 주장하며 면책특권을 외친다면 이보다 무책임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책을 끝맺는다. “‘다양한 영역이 겹치고 섞이는 다층적 세계’는 박정희와 전두환 때 지겹도록 살아봤다. 그래서 하나도 그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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