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순서
이름의 순서
  • 김용국(시인)
  • 승인 2020.01.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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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균, 신사2. 80×21x20cm. 알루미늄
정보균, 신사2. 80×21x20cm. 알루미늄

 

호올로 외로울 때
사랑하는 이름을
줄 세워봅니다.

옥이, 경이, 숙이, 정이, 철이…….

간절한 이름부터 
맨 앞줄에 저절로 섭니다.

호올로 번민할 때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도
줄 세워봅니다.

옥이, 경이, 숙이, 정이, 철이…….

미워하는 이름도
사랑하는 이름과 순서가 다르지 않습니다.

-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 미운 사람은 만나 괴롭다. // 그러므로 사랑을 지어 가지지 말라. /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니라. /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 모든 구속과 걱정이 없나니. // 사랑으로부터 걱정이 생기고 / 사랑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긴다. / 사랑이 없으면 걱정이 없거니 / 또 어디에 두려움이 있겠는가?’ 『법구경法句經, 애호품』(김달진 역, 양우당, 1983)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구경’의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않으므로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지 않겠는지요. 아님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겠는지요. 우리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는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번민과 고통의 애욕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거겠지요. 인생은 맹물이 되는 거겠지요. 언뜻 생각하기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미움도 구속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무미하고 건조하고 생기가 없는 사람일 뿐이지요. 

‘법구경’에서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미움에 닿아있고 미움은 사랑으로 생긴 것이니 미움 역시 사랑에 닿아있습니다. 미움이 왔다는 것은 사랑이 왔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미움은 풀어지고 낡은 사랑을 다시 점검해서 견고하게 하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미움은 이렇게 사랑과 닿아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맨 앞줄’에 세울지라도, 그 이름을 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의 ‘맨 앞줄’에 세웁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변용變容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미움도 없고 미움이 없는 사람은 사랑 역시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미워한다는 것은 누군가 사랑한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말이지요.

‘미워하는 이름도 / 사랑하는 이름과 순서가 다르지 않습니다. // - 똑같습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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