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가 있다. 사람을 가둘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올라가고 있는 건물을 멈춰 세울 수도 있고, 서 있는 건물을 허물 수도 있다. 사람 목숨과 햇빛에 가격을 매길 수도 있다. 부모와 자식을 떼 놓을 수도 있고, 만나는 날과 횟수를 정해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간통이라 했다가 마음이 바뀌면 사랑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폭력이라 질타했다가 어떤 경우는 괜찮다고 허용하기도 한다. 일할 수 있는 나이를 정해주고, 이부자리를 들추고, 양심을 손보기도 한다. 영생을 부여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말고는 못하는 게 없다.”

이런 신 같은 이를 우리는 법이라 부른다. 그러나 법이 직접 판결을 내릴 수는 없기에, 그 살아있는 현현인 재판관이 매주 법복을 입고 단에 오른다. 법정을 찾는 이들 치고 행복하고 낙관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 삶의 최전선에서 온갖 고초를 견디며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 탐욕과 이기심에 눈멀어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팽개친 사람들, 그리고 한때 서로를 신뢰했지만 이제 완벽한 적이 된 사람들이 상대의 악행을 목청 높여 고발하는 곳이 바로 법원이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에서, 판사가 황희 정승처럼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송에 타협은 없다. 승소 아니면 패소, 유죄 아니면 무죄, 정의 아니면 불의가 갈린다. 저자의 말마따나 재판은 양자역학의 세계가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디딘 현실은 단순계보다는 복잡계에 가깝고, 선과 악을 무 자르듯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사건을 법원칙대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정 안정성과 개별 사안에 따라 그에 맞는 최고의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구체적 타당성 사이에서 판사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엄정한 형식과 표현을 따르는 판결문에는 이러한 갈등과 실랑이를 걷어낸 건조한 결론만이 잠겨 있다. 그럼에도 판사 개인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는 곳. 바로 양형 이유다.

수많은 가정폭력, 성폭행, 사기, 산업재해, 소년범죄, 살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양형 이유에 밑줄을 그으며 궁금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매 순간 마주하는 슬픔, 좌절, 분노, 회한. 번민에 주저앉기에는 처리해야 할 사건이 너무도 많다. 2017년의 대법원 법관 1인당 처리 사건 수는 3,402건, 지방법원은 674건, 고등법원은 122건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트릭스와 현실세계를 분리하는 것이 답일까? “살인재판을 끝낸 뒤 맛있는 점심을 먹고, 강간재판을 마친 뒤 금목서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한다. 내 아이들은 선상하게 자라고, 다음 날이면 무자비한 학교폭력 사건을 처리할 것이다.”

세상의 참혹함을 애써 활자에 묻어두고 정시퇴근을 하여 안온한 일상을 누린다면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 된다. 반면 스스로를 불멸의 신이라 착각한다면 피고인들을 일장 훈계하며 심판의 칼을 휘두른다. 이 두 인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자의 말대로 마치 해리성 인격 장애자 같은 삶이다. 

“세상이 평온하고 빛날수록 법정은 최소한 그만큼 참혹해진다.” 무심히 지나치곤 하는 삶의 터전들에서 오늘도 얼마나 많은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을까. 사회가 이 정도나마 구색을 갖추는 것은 지금 이 순간도 지옥을 바라보며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일선에서 분투하고 계신 재판관들께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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