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TV 속으로
어머니가 TV 속으로
  • 김용국(시인)
  • 승인 2020.06.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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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어머니2-(wood)40x70x30cm
유성이, 어머니2-(wood)40x70x30cm

어머니가 TV 속으로 들어가신다.
220V 전기선을 따라
이승의 언덕을 넘어 가신다.
TV 속의 세상, 무릉도원으로 피난 가신다.
TV 화면이 닦아놓은
눈부신 길을 따라 걸어가신다.

앓던 복통이나 요통도 사라지고 
어머니는 14인치 브라운관 속으로 들어가신다.
웃거나 울거나 하시면서, 어떨 때는
혀를 차시거나, 죽일 연놈들 하시면서
TV 속의 사람을 꾸짖기도 하지만
TV 속의 사람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하나 같이 무던한 사람들이다.

마감 뉴스가 끝나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애국가,
‘만나면 좋은 친구’ 방송국 로고송이 사라질 때까지
TV 속에서 어머니는 당당한 어머니.

이젠 밤도 깊어
TV 스위치도 내려지면
어머니는 세상 같지 않은 세상으로 넘어오신다.
잠도 꿈도 허허한 
이승의 언덕으로 다시 넘어오신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몇 년은 집에서 몇 년은 요양원에 계셨습니다.

집에 계실 때나 요양원에 계실 때 어머니의 세상은 TV이었습니다. TV는 살갑지 않은 자식으로부터 위로였고, 뜻대로 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의 피난처였을 겁니다. 

늙어감에 따라 오는 육체적 무기력과 아픔, 남의 도움이 없이 거동할 수 없는 불편함, 점점 가까이 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겠지요. TV는 잠시나마 이런 아픔과 불편함 두려움의 잊게 하는 도구였겠지요.

노인들에게 자녀나 사회가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늙음 속에는 소외와 절망과 모멸과 회한, 무료함이 녹슨 나사처럼 박혀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좀 더 어머니에게 잘해 드려야 했는데 하는 가슴 싸한 후회가 밀려오는 날이 많아집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노쇠와 죽음이 나의 미래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이젠 밤도 깊어 / TV 스위치도 내려지면 / 어머니는 세상 같지 않은 세상으로 넘어오신다. / 잠도 꿈도 허허한 / 이승의 언덕으로 다시 넘어오신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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