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제주에서
  • 김용국(시인)
  • 승인 2020.07.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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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순식, 성산포 앞 바다
사진 정순식, 성산포 앞 바다

물에 물을 더해도 물이듯이
바다에 바다를 놓아도 바다이니
상념은 상념으로 불붙어 탈 뿐
무엇으로 이 마음을 가라앉히랴.

행장을 풀거나 묶어도
스쳐간 바람처럼 오는 바람도 
이곳에서는 억새를 허리까지 누이며
떠나는 것들뿐이리.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제주는 한라를 돛으로 올려 
망망한 바다 가운데 수평선까지
잠들지 못하는 나를 데리고 가고,

이틀이나 사흘을 지내며
성산이나 마라도, 천지연까지 둘러보아도
이 섬은 이곳 사투리처럼
진정 쉽지 않구나.

사람들 둘‧셋 모이기만 해도
즐겁게 여행의 풍물을 이야기하나
나그네가 만난 사람은 나그네
이별의 약속을 먼저 하느니.

제주는 바다였습니다.  바다를 쳐다보면 내 눈의 높이만큼 수평선이 놓여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자세를 바꿔도 수평선은 견고하게 내 눈과 수평을 맞추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평선은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각적으로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경계선일 뿐입니다. 없으나 우리가 있다고 믿고 싶은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삶이 총체적으로 신기루 같은 허상이라고 인식할 때, 인생은 텅 빈 어떤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처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자신의 ‘텅 빔’을 체험했을 때, 욕심에서, 어리석음에서, 미망에서, 분노에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주의 섬과 바다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수평선의 허상에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요. 제주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사람들 둘‧셋 모이기만 해도 / 즐겁게 여행의 풍물을 이야기하나 / 나그네가 만난 사람은 나그네 / 이별의 약속을 먼저 하느니.’

여행은 집 없는 사람들의 행로이지요. 어디든 오래 머물 수는 없지요. 그러니 여행 속에서의 만남은 이별입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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