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연합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 8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바닥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팻말이 놓여있다. 사진=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연합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 8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바닥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팻말이 놓여있다. 사진=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낙태죄 존치 여부를 두고 사회적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정부가 사실상 낙태죄를 유지하기로 한 입법개선안을 발표하자, 여성단체와 낙태죄 존치론자 등 양측에서 모두 비판을 제기하고 나선 것.

정부가 지난 7일 발표한 낙태죄 관련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산모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15~24주 사이에는 모자보건법상 낙태 사유를 좀 더 확대했다. 기존에는 산모·배우자의 유전적 질환이나 성범죄·근친관계에 따른 임신만이 낙태 사유로 인정됐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도 상담과 24시간의 숙려기간을 거쳐 결정할 수 있다. 24주 이후의 인공임신중절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여성단체 등에서는 이번 개정안이 사실상 사문화된 낙태죄 처벌을 부활시킨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반면, 낙태죄 존치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정부안이 무분별한 '태아살해'를 묵인하는 것이라며 다른 방향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OECD 회원국의 낙태율(15~44세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 표시는 15~49세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자료=한국보건사회연구원
OECD 회원국의 낙태율(15~44세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 표시는 15~49세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자료=한국보건사회연구원

◇ 낙태죄 폐지하면 낙태율 증가할까? OECD 회원국 비교해보니

이처럼 정부안을 놓고 뜨겁게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할 경우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되고 낙태율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뉴스로드>가 여러 연구기관의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실상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6개 OECD 회원국 중 한국의 낙태율(15~44세, 1000명 당 낙태 건수)은 2010년 기준 15.8건으로 스웨덴과 에스토니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었다. 반면 한국과 달리 어떤 사유로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칠레의 경우 0.5건(2005년)으로 한국에 비해 낙태율이 상당히 낮았다.

하지만 본인 요청이나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들도 한국에 비해 낙태율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오스트리아(1.4건, 2000년), 독일(7.2건, 2012년), 노르웨이(12.0건, 2015년), 프랑스(15.0건, 2015년), 덴마크(15.5건, 2010년) 등은 한국보다 낮은 낙태율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보고서에는 낙태에 관대한 법·제도를 갖춘 국가일수록 낙태율이 더 감소한다는 결과도 나와 있다. 구트마허연구소가 지난 2018년 1990~2014년 92개국의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낙태율이 가장 낮은 국가는 스위스(5건, 2014년)였다. 그 뒤는 싱가포르(7건, 2013년), 슬로바키아(8건, 2014년), 스페인(9건, 2014년)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산모의 요청이나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들이다. 

반면 낙태율이 높은 국가들은 파키스탄(50건, 2012년), 케냐(48건, 2012건), 인도(47건, 2015년), 네팔(42건, 2014년) 등이 산모 요청에 따른 낙태를 금지한 국가들이었다. 또한 그 밖에도 사회경제적 사유나 산모의 건강에 따른 낙태도 허용하지 않는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낙태율이 높았다. 

 

주요 국가의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자료=구트마허연구소
주요 국가의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 초록색 그래프는 추정치. 자료=구트마허연구소

 

◇ 낙태율 감소, 원인은 ‘형벌’이 아닌 ‘피임’과 ‘관용’

일각에서는 낙태죄 폐지가 낙태율 증가로 이어진다는 주장의 근거로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든다. 실제 미국의 낙태율은 지난 1973년 여성이 임신중절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두 배 가까이 급증한 바 있다. 1973년 16.3건이었던 여성 1000명 당 낙태 건수가 1980년 29.3건까지 증가한 것. 

하지만 낙태율의 변동 양상은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 1980년 최고점에 다다른 미국의 낙태율은 이후 2017년 13.5건으로 대법원 판결 이전보다 낮은 수준까지 감소했다. 구트마허 연구소에 따르면, 특히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간 미국의 15~44세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는 19.4건에서 14.6건으로 약 25%나 감소했다. 

이 기간 미국의 낙태 관련 법·제도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인디애나, 캔자스, 텍사스, 노스캐롤라이나 등 일부 지역에서는 낙태 전 대기기간, 초음파 검사 필수화 등 낙태와 관련해 여러 제한을 추가 적용했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낙태를 결정한 여성에게 보험혜택을 확장하는 등 정반대의 정책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낙태율은 일관되게 감소했다는 점에서, 낙태 허용과 낙태율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시기 미국의 낙태율이 급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자들의 결론은 단순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레이첼 존스·제너 저먼 박사는 이 시기 미국 낙태율의 급격한 감소의 원인으로 ‘피임법’의 개선을 지목했다. 장기간 지속되는 가역성 피임약(LARC) 활용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원치 않는 임신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것.

싱가포르 또한 낙태시술 수가 1985년 2만4000여 건에서 2017년 7217건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특히 20세 이하 임산부가 낙태 시술을 받은 경우는 2007년 1363건에서 2016년 343건으로 줄어들었다. 싱가포르 보건부는 피임법 활성화와 더불어, 비혼 임산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면서 낙태율이 감소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인종별 낙태율 변동 추이. 자료=구트마허연구소
미국의 인종별 낙태율 변동 추이. 자료=구트마허연구소

 

◇ 계층따라 달라지는 낙태율, '처벌'보다 '보호'가 우선 

한편, 존스·저먼 박사의 연구는 낙태 문제에 대해 처벌이 아닌 사회적 보호와 연대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도 보여준다. 이들은 논문에서 인종과 소득, 교육수준 따라 낙태율을 비교했는데, 흑인·저소득층일수록 백인·고소득층에 비해 낙태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2014년 기준 낙태율이 가장 높은 인종은 흑인(27.1건)이었으며, 히스패닉(18.1건), 기타(16.3건), 백인(10.0건) 등의 순이었다. 

소득별로는 가구 소득이 연방 빈곤선의 100% 미만인 경우 낙태율이 36.6건까지 치솟는 반면, 200% 이상인 경우는 9.4건까지 감소했다. 교육수준별로는 고졸(23.6건)이 대졸(13.4건)보다 낙태율이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이는 결국 ‘낙태’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치 않는 임신을 강요받기 쉽고, 올바른 피임법 및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취약계층일수록 임신중절을 경험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 낙태율 증가가 우려된다면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것 보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내몰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호소하는 것이 우선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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