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부통령이 된 첫 여성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밤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어린 여성들이 이곳은 가능성이 가득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7일(현지시간) 미국 부통령직 수락 연설 중인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 사진=카말라 해리스 공식 트위터.
7일(현지시간) 미국 부통령직 수락 연설 중인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 사진=카말라 해리스 공식 트위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여풍’(女風)이다. 역대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비(非)백인 부통령으로 선출된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성평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미국 정치 무대에 주인공으로 올라섰기 때문. <뉴스로드>는 이번 선거에서 미국의 정치 지형이 ‘젠더’ 관점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주요 당선자를 중심으로 되짚어봤다.

◇ 카말라 해리스, 인종·여성 이슈 내세워 바이든 승리 이끌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여성은 단연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이다. 1964년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와 인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해리스 부통령은 미국에서는 이미 ‘포스트 오바마’로 불리고 있다. 흑인·아시아계로서 어린 시절부터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해리스 부통령은 워싱턴 D.C.의 하워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주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2016년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여성이자 흑인·아시아계로서의 정체성은 그녀의 정치행보에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이 됐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경쟁 중이었던 지난 6월 해리스는 TV 토론회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과거 인종통합 교육 반대 이력을 지적하며 날카로운 공격을 펼쳐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다. 7일(현지시간) 부통령직 수락 연설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인 흰색 옷을 입고 나와 수많은 여성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음을 강조하며 “오늘밤 나는 이 여성들의 투쟁과 결단, 그리고 그들의 비전이 가진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어깨 위에 서있다”고 말했다. 

해리스의 부통령 당선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대통령의 그림자 역할을 맡았던 과거의 부통령들과 달리 그에게 상당한 실권이 주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 해리스는 고령의 백인 후보인 바이든 후보가 인종차별 이슈로 비백인 표를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닝메이트로 등장해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고령의 바이든 당선인이 건강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해리스가 임기 중 대통령직을 맡게 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만약 바이든 당선인의 건강이 임기 중 악화될 경우, 해리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

자료=럿거스 대학 미국여성정치센터(CAWP)
자료=럿거스 대학 미국여성정치센터(CAWP)

◇ 의원 4명 중 1명은 여성, 숫자로 본 ‘여풍’

이번 선거의 ‘여풍’은 숫자에서도 드러난다. 럿거스 대학의 미국여성정치센터(CAWP)가 현재까지의 선거 결과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상·하원에서 당선된 여성 의원은 지난 선거(127명)보다 11명 늘어난 138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535석 중 25.8%가 여성 의원으로 채워지게 된 것으로, 의원 4명 중 1명은 여성인 셈이다. 

정당별로는 민주당이 105명에서 104명으로 1명 감소한 반면, 공화당은 22명에서 34명으로 여성 의원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지난 선거와 동일한 88명, 공화당은 지난 선거의 두 배인 26명의 여성 의원을 배출해 총 114명의 여성 하원의원이 당선됐다. 

반면 상원에서는 민주당(17→16명)과 공화당(9→8명) 모두 여성 의원 수가 1명씩 줄어들었다. 

워싱턴주에서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 의원으로 선출된 메릴린 스트랙랜드 후보. 사진=메릴린 스트릭랜드 선거캠프 홈페이지
워싱턴주에서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 의원으로 선출된 메릴린 스트랙랜드 후보. 사진=메릴린 스트릭랜드 선거캠프 홈페이지

◇ 한국계, 싱글맘, 트랜스젠더, 소수자 위해 초석 다진 당선인들

이번 선거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여성 정치인은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뿐만이 아니다. 지난 3일(현지시간) 워싱턴주 10선거구에서는 미국 역사상 첫 한국계 여성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메릴린 스트릭랜드로, ‘순자’라는 친근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다. 1962년 미군인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이번 선거로 워싱턴주가 배출한 첫 흑인 의원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차지하게 됐다. 

스트랙랜드 당선인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실제 그는 선거캠프 홈페이지를 통해 “제가 당선된다면 저는 워싱턴주 최초의 흑인 연방 의원이자, 230년 하원 역사 최초의 한국계 여성 의원이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주리주가 배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 코리 부시(위)와 델라웨어주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트렌스젠더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사라 맥브라이드. 사진=코리 부시, 사라 맥브라이드 선거캠프 홈페이지
미주리주가 배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 코리 부시(위)와 델라웨어주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트렌스젠더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사라 맥브라이드. 사진=코리 부시, 사라 맥브라이드 선거캠프 홈페이지

미주리주에서는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코리 부시 민주당 후보가 10선의 거물 윌리엄 레이시 클레이 공화당 의원을 누르고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코리 부시는 2014년 미주리주에서 십대 흑인 청소년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 뛰어든 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구호를 내세우며 인종차별에 맞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코리 부시는 지난 2016년 상원의원 경선, 2018년 하원의원 경선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의회 입성에 성공하게 됐다. 

델라웨어주에서는 최초의 트랜스젠더 의원이 선출됐다.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인 사라 맥브라이드 민주당 후보는 4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1선거구에서 7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스티브 워싱턴 공화당 후보를 큰 격차로 눌렀다.

맥브라이드 당선인은 9일 트위터를 통해 “7년 전 나와 부모님은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델라웨어주 의회에 섰다”며 “새롭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나의 책무는 모든 이웃의 기회와 존엄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