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11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11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차별금지법제정연대

11월 11일은 흔히 연인들이 과자 선물을 주고 받는 ‘빼빼로 데이’로 알려져 있지만,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농업인의 날’, ‘해군창설기념일’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부터 11월 11일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이 됐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인 내달 10일을 한 달 앞두고, 11월 11일을 ‘평등의 날’로 정해 기념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숫자 11을 눕히면 등호(=)와 모양이 같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이런 제안을 내놓은 이유는 바로 10년이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14년째 차별금지법 제정의 속도가 더딘 현실이 개탄스럽다”라며 “오늘을 기점으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한국 사회에 공기처럼 만연한 차별의 현실을 다른 시점에서 짚어보고 그 현실이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밝혔다.

◇ 차별금지법, 여섯 번이나 국회에서 실패한 이유

현재 국회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 9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이 법안은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예방·금지”하기 위한 법안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 가해자에게 시정 명령을 내리고 미이행 시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반복해서 부과하는 등의 대책이 담겨 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처음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데 이어 노회찬, 권영길, 김재연, 김한길, 최원식 의원 등 총 여섯 차례의 입법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국회 임기 만료와 법안 철회로 논의가 무산됐다. 

논의가 무산된 배경에는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발이 놓여있다. 실제 지난 2007년 정부안에는 ‘성적지향’이 불합리한 차별 사유로 명시됐으나, 정부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개신교계의 비난이 거세지자 결국 법안에서 제외됐다. 이후에도 차별금지법이 사회적 의제로 부각될 때마다 개신교계는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이 같은 상황은 장 의원안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은 ‘평등의 날’ 하루 뒤인 지난 12일, 서울광림교회에서 ‘위장된 차별금지법 반대와 철회를 위한 한국교회기도회’를 열었다. 한교총은 매달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 합동 기도회를 열고 있는데, 지난 6월 기도회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결과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결혼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문수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도 지난 10일 110차 총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저지해야만 한다. 그 안에 감춰진 내용이 반(反)기독교적이고, 반윤리적이기 때문”이라며 에 “특히 동성애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5일 조계정 사회노동위원회와 정의당, 시민단체가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도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정의당
5일 조계정 사회노동위원회와 정의당, 시민단체가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도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정의당

◇ 불교 '찬성', 천주교 '중립', 개신교의 반대 명분은?

하지만 개신교의 반발은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경우 차별금지법에 대해 개신교처럼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내부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에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불교의 경우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성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실제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지난 2일 개신교 신자의 사찰 방화 사건과 관련해 성명을 내고 “우리 사회는 나이·성별·지역·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증오를 키우고 있다”며 “국회와 정부는 방관하지 말고 반사회적인 폭력·방화·위협 등에 대해서 엄벌하고 증오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성적지향 및 성정체성과 관련해 보수적인 천주교의 경우, 동성혼에 대해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동성애 차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차별금지법에 대해 강하게 수정·철회를 요구하기는 부담스러워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로마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불행해져선 안 된다”며“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성결합법이다. 이것은 그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 장혜영, "차별금지법은 글로벌 스탠다드"

일각에서는 국내에 이미 차별을 금지하는 다양한 개별 법률이 있는데 굳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포괄적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독립적으로 제정하는 것은 이미 국제적인 추세다. 

실제 영국(평등법, 2006년), 독일(일반평등대우법, 2006년), 스웨덴(차별금지법, 2008년), 캐나다(인권법, 1977년), 멕시코(차별방지 및 금지법, 2003년) 등은 많은 국가들은 이미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해 시행해오고 있다. 이 법안들은 모두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불합리한 차별 사유로 명시하고 있다. 

설령 법률에 성정체성이 불합리한 차별 사유로 포함되지 못했더라도, 실제 법 집행 과정에서는 이를 고려해 판결을 내리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1964년 제정된 민권법 제7편에 인종, 피부색, 종교 등의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해뒀다.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은 차별사유로 포함되지 않았지만,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 및 법원의 결정에 따라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 정부 또한 개별 법률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9월 21일 법사위에서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으로부터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 법률과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충돌할 수 있지 않나”라는 질문을 받자, “해외 사례를 보면 다수 국가가 이런 법을 갖고 있다. 현재 국제사회의 추세로 봐서 인간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국민에게 보장하는 차별금지법은 있어야 하는 법안”이라고 답했다.

한편, 정의당은 내달 10일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집단행동에 나설 방침이다. 법안을 발의한 장혜영 의원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는 다양성의 민주주의다. 차별금지법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나라다운 나라를 염원하며 시민들이 들었던 촛불로 만들어진 21대 국회에서조차 차별금지법이 심의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국민께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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