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사유리 씨가 지난 16일 KBS 인터뷰를 통해 정자기증을 받아 출산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진=사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방송인 사유리 씨가 지난 16일 KBS 인터뷰를 통해 정자기증을 받아 출산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진=사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요즘 ‘낙태를 인정하라’는 주장이 있었잖아요. 그걸 거꾸로 생각하면 ‘아이를 낳는 것도 인정하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지난 4일 정자기증을 받아 아들을 출산한 방송인 사유리 씨는 16일 KBS와의 인터뷰 말미에 비혼 여성의 출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있다. 출산 사실을 밝힌 사유리 씨의 인스타그램에도 무려 5만개가 넘는 ‘좋아요’와 수천개의 댓글이 달려 그의 선택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유리 씨가 출산 사실을 밝히며 이런 목소리를 낸 것은 실제로 국내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가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리 씨는 KBS를 통해 “한국에서는 모든 게 불법이다. 결혼한 사람만 시험관이 가능하다. 입양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한국도 일본도 싱글맘은 입양이 불가능하다”며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지 토로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2017) 중 정자 공여 관련 부분. 자료=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2017) 중 정자 공여 관련 부분. 자료=대한산부인과학회

◇ 불법도 합법도 아닌 비혼출산... 관련 규정 모호

그렇다면 비혼 여성에 대한 정자기증이 불법이라는 사유리 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정확히 따지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 24조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배아 생성을 위해 난자·정자를 채취할 때 체외수정 시술대상자의 배우자에게 서면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배우자가 있는 경우’에 한정되며 배우자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이 없다. 즉 비혼 여성이 정자기증을 받아도 불법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비혼 여성이 ‘합법’적으로 정자기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난자와 정자를 채취하는 것은 자연적인 생식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난임’을 극복하기 위한 ‘보조생식술’에 속한다. 문제는 모자보건법이 보조생식술을 받을 수 있는 난임 상태를 “사실혼을 포함한 부부가 피임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합법적으로 정자기증을 받기 위해서는 혼인관계에 속해야 한다는 것. 

현장의 지침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7년 개정된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은 “정자 공여 시술은 원칙적으로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자·난자 매매나 대리모 문제 등이 발생할 위험을 고려해 체외수정, 정자기증 등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 

결국 이처럼 비혼 여성의 출산은 한국에서 합법도 불법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 놓여있다. 비혼 여성에 대한 정자기증의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의료계의 기준도 엄격해지면서 사실상 한국에서 비혼 여성이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OECD 회원국의 혼외출산 비중. 한국(맨오른쪽)은 2018년 기준 2.2%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순위에 머물렀다. 출산율 또한 마찬가지로 꼴찌였다. 자료=OECD
OECD 회원국의 혼외출산 비중. 한국(맨오른쪽)은 2018년 기준 2.2%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순위에 머물렀다. 출산율 또한 마찬가지로 꼴찌였다. 자료=OECD

◇ 터부시되는 혼외출산, 저출산 흐름 악화시켜

더욱 중요한 사실는 비혼 여성의 출산권을 요구하는 사유리 씨의 목소리가 단순히 일개 법령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률적 혼인관계 외부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금기시하는 한국사회의 법적·문화적 환경은 ‘저출산’이라는 긴급한 과제와도 맞닿아있다.

실제 한국의 혼외출산 비중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혼외출산 비중은 겨우 2.2%로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10% 이하인 국가로 범위를 넓혀도 이스라엘(7.5%), 터키(2.9%), 일본(2.3%) 등 4개 뿐이다. 종교·문화적 이유로 인해 이성 간의 혼인이 아닌 관계, 또는 그 관계에서의 출산을 금기시하는 나라들이 대체로 혼외출산 비중이 낮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은 독보적인 수준이다.

문제는 혼외출산 비중이 낮은 국가일수록 저출산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혼외출산 비중이 OECD 평균(40.7%)보다 높은 상위 21개국과 그보다 낮은 하위 21개국의 평균 출산률은 각각 1.64, 1.59명으로 0.05명의 차이가 난다. 혼외출산 비중이 50% 이상인 상위 13개국(1.69명)과 30% 이하인 하위 11개국(1.58명)의 차이는 0.11명으로 더 크게 벌어진다.

이는 혼외출산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높고 법적·행정적 지원체계가 제대로 구축된 국가일수록 저출산의 늪에서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없다면, 결혼 이외의 출산 가능성이 가로막히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도 낮아지게 될 뿐이다.

 

2019년 여성가족부의 가족 다양성 수용도 조사. 위는 특정한 가족형태에 대한 수용 가능성을, 아래는 특정 가족형태를 본인 또는 자녀의 배우자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자료=여성가족부
2019년 여성가족부의 가족 다양성 수용도 조사. 위는 특정한 가족형태에 대한 일반적인 수용 가능성을, 아래는 본인 또는 자녀가 결혼하려는 상대방 가족 형태에 대한 수용 가능성을 나타낸다.자료=여성가족부

◇ 법 개정 이전에 사회적 인식 변화 필요

사유리 씨의 호소가 전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정계에서도 법률 개정을 검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8일 “비혼 임신에 대한 법률 검토에 착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법률이 개정된다고 해도 혼외출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걷히지 않는다면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이성 간의 법률적 결혼이 아닌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높아졌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조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외출산에 대한 편견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혼인·혈연에 무관하게 생계와 주거를 공유할 경우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66.3%가 동의했다. 국제결혼, 이혼·재혼, 비혼독신 등의 가족형태를 수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각각 89.2%, 86.7%, 79.3%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수용도가 50.6%로 급감했다. 본인이나 자녀의 결혼 상대가 비혼동거 가족의 자녀일 경우에도 수용도는 45.2%에 불과했다. 혼외출산이 자신의 일로 다가올 경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이 여전히 절반이 넘는 셈이다.

“요즘 ‘낙태를 인정하라’는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 것을 인정해라’ 이렇게 하고 싶어요. 낙태만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것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사유리 씨는 16일 KBS와의 인터뷰 말미에 낙태할 권리뿐만 아니라 출산할 권리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의 재생산권이 보장되고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어떤 저출산 대책도 무용지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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