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의 소비와 소득 증가율(2020년은 추정치). 자료=한국은행
가계 소비 및 소득 증가율(2020년은 추정치). 자료=한국은행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기가 크게 위축되면서 지갑을 닫고 저축을 늘리는 가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저축해둔 돈이 시장에 풀리면서 소비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은 반면, 위기 상황의 소비-저축 패턴이 고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코로나19로 소비 ‘감소’, 가계저축률은 증가

한국은행은 29일 공개한 ‘코로나19 위기에 따른가계저축률 상승 고착화(level-up) 가능성’ 보고서에서 올해 가계저축률이 지난해(6.0%)보다 약 4.0%p 증가한 10% 내외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한은 전망대로 올해 가계저축률이 10%를 넘게 되면 지난 1999년 이후 21년 만에 두 자릿수를 기록하게 되는 셈이다. 

가계저축률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지출을 뺀 나머지의 비율을 뜻한다. 즉, 저축률이 늘어나려면 소득이 늘어나거나 지출이 줄어들어야한다.

한은은 올해 저축률 상승의 원인을 소득 증가가 아닌 지출 감소에서 찾았다. 한은은 “코로나19 위기 과정에서 단기적으로는 비자발적 소비제약의 영향이 상당부분 작용하면서 국내 가계저축률이 크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소비와 달리 가계소득은 임금소득 정체 및 자영업 위축에도 불구하고 정부지원 확대에 힘입어 미약하나마 증가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한은에 따르면 올해 음식·숙박(-9.1%), 오락·스포츠(-18.2%), 교육(-15.0%) 등 대면서비스 분야의 민간소비(명목)는 대부분 크게 감소했다. 게다가 각국의 봉쇄조치로 여행산업이 크게 위축되면서 내국인의 해외소비도 47.8%나 줄어들었다. 

반면 임금 정체와 고용 한파, 자영업 위기에도 불구하고 정부 지원 덕에 가계 소득은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530만5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했다.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이 각각 1.0%, 1.1% 감소했지만 정부 및 지자체 지원금 등을 포함한 이전소득이 17.1%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주요국 저축률 및 상승요인. 자료=국제금융센터
주요국 저축률 및 상승요인. 자료=국제금융센터

◇ 가계저축 증가가 경기에 미칠 영향

코로나19 이후 저축률이 상승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다. 실제 국제금융센터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속 주요 선진국의 가계저축 증가 추세’ 보고서에 따르면, 9월말 기준 미국·유로존·영국의 저축률은 전년말 대비 각각 6.9%p, 12.3%p, 25.8%p나 상승했다. 향후 1년간 저축 의향을 나타내는 유로존의 저축의향지수(saving expectations)도 최근 20년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높은 가계저축률은 기업의 투자재원을 늘려 경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소비기반이 약화되고 경기부양책의 효과가 저하되는 부작용도 있다. 개별 가계는 늘어난 저축으로 안정된 생활을 꾸릴 수 있지만, 경제 전반은 수요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악화되는 ‘절약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

일각에서는 최근의 저축률 상승이 코로나19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뿐, 사태가 종식되면 다시 소비가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코로나19로 인한 ‘비자발적’ 소비제약이 저축률 상승의 주된 원인인 만큼,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억눌렸던 소비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실제 미국은 봉쇄조치 강화로 올해 4월 저축률이 33.6%까지 급등했으나, 이후 봉쇄조치가 완화되면서 9월 들어 14.3%까지 하락했다. 

 

미국 월별 개인저축률. 자료=한국은행
미국 월별 개인저축률. 자료=한국은행

◇ 불확실성 경험한 경제주체들, 학습효과 장기화될 수도

반면, 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상승한 저축률이 장기적으로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금융센터는 “늘어난 저축 중 고용, 소득, 금융, 정책불확실성으로 인한 가계의 자발적 저축이 40%를 차지하고 있다”며 “불확실성에 대비한 자발적 저축은 봉쇄조치가 완화되어도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봉쇄조치에 따른 ‘비자발적’ 소비제약으로 인한 저축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고 대면서비스가 전면 재개되면 다시 소비로 환원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불확실성에 대비해 소비를 자제하고 저축을 늘려야 한다고 학습한 사람들의 소비·저축행태는 위기가 끝난 뒤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미국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저축률이 급등했다가 위기가 진정된 후 어느 정도 하락했지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수준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1992~2019년 미국 연도별 개인저축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급등한 저축률이 이전 수준으로 하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한국은행
1992~2019년 미국 연도별 개인저축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급등한 저축률이 이전 수준으로 하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한국은행

한은은 “향후 경기부진이 지속되고 정부지원마저 제약된다면 가계소득이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중심으로 매우 부진한 흐름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미래소득에 대한 가계의 인식이 악화되면서 예비적 저축이 늘어날 수 있다”며 “또한 앞으로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미래소득과 관련한 높은 불확실성이 지속될 경우 가계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늘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저축률이 높은 상태로 고착화되면 소비부진이 장기화되면서 고용위축과 물가하락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은은 “ 가계저축률 상승은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투자부진, 인구 고령화 등으로 잠재성장률이 낮아진 우리 경제에 향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며 “가계저축률의 고착화를 초래할 수 있는 가계 소득여건 악화 및 신용제약 증대, 소득 불평등 심화 등 구조적 요인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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