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오면
노을이 오면
  • 김용국(시인)
  • 승인 2020.1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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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돌아오는 길, 50x50cm, 장지 수채 아교.
이은주, 돌아오는 길, 50x50cm, 장지 수채 아교.

 

노을이 오면 아내는
창문을 열고 나를 부릅니다.
눈빛으로 가리키는 서녘
아내의 얼굴은 이미 노을입니다.

나무들도 겨드랑이까지 물들고
붉은 조개구름들이 줄줄이
앉아 있는 산등성
나도 오늘은 노을처럼 붉어지리라.

좀 더 멀리 보여 달라고
아들놈은 내 가슴에 안기고
우리 세 식구가 노을을 보면
하루는
노을빛으로 곱게 익습니다.

기억조차 아득한 옛날입니다. 이곳저곳 세를 살다가 어렵사리 작은 아파트를 구해 이사했었지요. 우리 집은 아파트의 가장 위층인데다가 아파트 자체가 산 중턱에 세워져 있어 풍경을 보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지요.

비가 와도 우리 집에 먼저 닿는 것 같았고, 눈이 내려도 우리 집에 먼저 쌓이는 것 같았습니다. 노을도 그랬을 터인데, 노을이 붉게 밀려오면 아내는 노을을 보라고 서둘러 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내 아이도 그 노을을 보겠다고 뛰어와 나에게 안기곤 했습니다. 노을은 항상 안타깝게 사라지지만 붉은 노을빛은 길고 길게 우리 세 식구의 마음속에 새겨졌겠지요.

그 집에서 우리 아이가 자랐고 퇴근 시간을 기다려 아내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를 마중을 나오곤 했습니다. 어렵고 막막하고 부족했지만 그때처럼 행복으로 가득 찼을 때는 없었을 겁니다. 

내 아이는 몇 해 전에 결혼해서 집을 떠나고 아내와 나는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때 쓴 시입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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