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20번 문항. 자료=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20번 문항. 자료=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험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마무리하고 오랜 수험생활 끝에 달콤한 휴식을 즐기게 된지 닷새가 지났다. 당사자인 수험생들은 잠시 시험을 잊고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정작 어른들은 여전히 수능을 두고 정치적 논란에 빠져 언쟁을 벌이는 모양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수능 한국사 20번 문제다. 이 문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92년 1월 연두 기자회견 담화문 중 일부를 소개한 뒤, 해당 연설이 행해진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을 다섯 개의 보기 중 고르라는 내용이다.

우선 논란이 된 것은 3점짜리 문제치고는 난이도가 지나치게 쉽다는 것이다. 정답인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을 제외하면 보기에는 ▲당백전 발행 ▲도병마사 설치 ▲노비안검법 시행 ▲대마도 정벌 등 현대사와 관련 없는 내용이 열거됐기 때문. 게다가 지문에 ‘남북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등의 표현이 나와 있어 사실상 변별력이 없는 문제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진짜 논란은 그 뒤에 이어졌다. 야당 및 보수성향 언론에서 정부가 수능을 이용해 대북정책을 홍보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 문재인 정부가 일부러 남북관계와 관련해 누구나 맞힐 수 있는 쉬운 문제를 출제해, 수험생들을 현 정권의 대북정책 기조에 친숙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수능 다음 날인 지난 4일 페이스북에 20번 문항을 올리고 “어제 치러진 수능 한국사 문제입니다. 페친 여러분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날카롭거나 재치가 번뜩이거나 느긋하거나 식견이 스며나오거나...단상을 나눠주세요. 대환영입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국정 홍보용 문제”, “문재인 정부의 자화자찬”, “이런 문제를 낸 출제위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언론도 의혹 제기에 동참했다. 동아일보는 수능 다음 날인 4일 “3점 보너스 문제? 세뇌교육? 수능 한국사 20번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 의원의 발언을 소개했다. 서울경제도 이날 “‘文정부 맞춤형 문제’, ‘보너스냐’...수능 한국사 20번 문제 ‘시끌’”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논란을 보도했다. 

 

사진=국민의힘 페이스북
사진=국민의힘 페이스북

◇ 박근혜·이명박 정부도 매년 수능에 남북협력 관련 문항 출제

‘햇볕정책’을 계승한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 홍보를 위해 과거 남북협력 사례를 수능 문제로 출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은 야권과 언론이 제기한 뒤 여전히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재확산되고 있다. 

정부가 정말 대북정책 홍보용으로 수능 한국사 20번 문항을 출제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러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정책홍보’라는 비판은 근거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과거 수능 한국사 영역의 출제 경향을 되짚어보면 된다. 만약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남북 협력·대화와 관련된 문제의 출제 빈도가 높아졌다면,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정권과 관계없이 비슷한 문항이 출제돼왔다면, 이러한 의구심은 공연한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뒤 치러진 네 번의 수능 중 한국사 영역에 남북협력과 관련된 내용이 출제된 것은 세 번이었으며, 모두 20번 문항으로 출제됐다. 2020학년도 수능에는 남북 협력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묻는 문제가 출제됐으며, 2019학년도 수능에는 올해와 마찬가지로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다만 2018년에는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에 대한 내용이 20번 문항으로 출제됐다.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1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 문항. 1991년 광복절 노태우 대통령 연설문(위)과 2000년 광복절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 내용 중 일부가 소개됐다. 자료=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1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 문항. 1991년 광복절 노태우 대통령 연설문(위)과 2000년 광복절 김대중 대통령 연설문 내용 중 일부가 소개됐다. 자료=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재인 정부 이전에는 어땠을까? 7차 교육과정이 반영된 2005학년도 수능부터 2017학년도 까지 총 13번의 수능에서 한국사, 또는 한국 근·현대사 영역에 남북협력 관련 문제가 출제되지 않는 것은 2015학년도와 2006학년도 등 단 두 번 뿐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매년 남북협력과 관련된 문제가 출제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의 남북협력은 수능에 단골 출제되는 내용이다. 올해 수능은 물론 2014학년도(남북 유엔 동시 가입), 2011학년도(광복절 46주년 대통령 연설문 중 남북관계 관련 내용), 2007년(1991년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등 15번의 수능 중 네 번이나 등장했다. 

그 밖에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 등은 수험생이라면 빼놓지 않고 숙지해야 할 정도로 자주 출제됐다. 경우에 따라 2015년 개성 만월대 유적 남북 공동 발굴 사업 재개(2016학년도), 2003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북한 선수·응원단 참가(2004학년도) 등의 내용이 출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남북관계 문항들은 연도별로 배점은 달라지지만 대부분 20번에 배치됐다. 2005학년도 수능 이후 남북관계 문항이 20번에 배치되지 않은 경우는 2011·2009·2007학년도 등 단 세 번 뿐이다.

결국 수능 한국사 영역 20번 문항에 남북협력에 대한 내용을 출제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던 셈이다. 그동안의 출제 경향을 돌아볼 때, 올해 수능 한국사 20번 문항이 정권 홍보, 통일교육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의혹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최태성 EBS 한국사 강사 페이스북
사진=최태성 EBS 한국사 강사 페이스북

◇ 난이도 논란이 정치적 논란으로. 탈바꿈, 언론 오보도 한 몫

문제는 몇 년간의 수능 출제경향만 돌아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데도, 지나치게 몰입한 일부 언론이 섣부르게 의혹을 제기하다 오보까지 내는 소동까지 발생했다는 점이다. 

실제 조선일보는 지난 4일 “너무 쉬운 한국사 20번 논란… 수능 문제로 정권 홍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20번 문항의 지문을 “문재인 대통령 연설의 일부”라고 잘못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뒤늦게 오보임을 확인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수정한 뒤, 제목도 “중학생도 안 틀릴 한국사 20번 논란…수능 문제인지 통일교육인지”로 바꿨다. 

한국경제 또한 이날 “수능으로 文정권 홍보?… ‘한국사 20번 문제’ 어떻길래”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고 지문 내용이 문 대통령 연설 중 일부라고 보도했다. 이후 한국경제는 제목을 “수능으로 통일 교육?…'한국사 20번 문제' 어떻길래”로 바꾸고,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연설 내용”이라는 문구도 “남북관계에 대한 연설 내용”으로 수정했다. 

언론이 수능 문제의 난이도를 두고 불거진 논란을 정치적 논란으로 비회시키려다 벌어진 촌극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최태성 EBS 한국사 강사는 4일 페이스북에 조선일보 기사를 소개하며 “아... 쉽다면서 틀리면ㅠㅠ 이건 노태우 정부거늘”이라고 말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또한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노태우 정부 때 일인데 현정부와 연계해서 정치적 비판을 가하는 건 과민반응 같다”며 “코로나로 학교도 못 가고, 시험 보면서도 고생한 고삼 수험생들을 위한 보너스 문제였다고 너그럽게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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