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페이스북 갈무리
사진=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그동안 개혁입법을 위해 협력해온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에 다시금 균열이 가고 있다. 균열의 이유는 의외로 두 당이 대립하고 있는 이슈가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낙태죄’ 폐지 문제 때문이다.

두 당 사이에 잡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지난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낙태죄 개정 관련 공청회부터다. 이날 김남국 민주당 의원이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에게 낙태죄 개정안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에 대해 질문하자,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공청회가 끝난 뒤 논평을 통해 “여성들의 삶을 짓밟았던 공청회에서의 망언”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김남국 의원은 9일 페이스북을 통해 남성도 낙태에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정의당이 왜곡했다며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정의당은 김 의원이 지난 8일 조 대변인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낙태죄 폐지는 물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의 사안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박 전화를 했다고 맞받았다. 

그러자 김 의원은 10일 정의당이 ‘남성혐오’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며 더 이상 논쟁을 이어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현재 김 의원과 정의당 간의 설전은 중단된 상황이다.

 

한국갤럽이 2019년 3월 발표한 낙태 관련 인식 조사 결과. 자료=한국갤럽
한국갤럽이 2019년 3월 발표한 낙태 관련 인식 조사 결과. 자료=한국갤럽

◇ 낙태죄에 대한 한국 남성들의 인식은?

김 의원은 자신이 낙태죄 폐지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을 질문한 이유에 대해 “낙태죄에 대해 과거와는 달리 남성도 함께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인식 아래 해당 법안에 대한 2030남성의 생각이나 의견 등이 조사·연구되었는지 물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수행하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등의 국가통계는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남성 인식에 대한 자료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하고 질문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김 의원이 알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낙태죄 인식에 대한 자료는 정말 없을까? 사실 김 의원이 공청회 참석 전 몇 분만 검색을 해봤더라도 위와 같은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신 국가통계는 아니지만 민간 여론조사기관에서 수행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한국갤럽이 남성 504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에 낙태 수술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은 결과 응답자의 78%가 “있다”, 13%다 “없다”고 답했다. 이는 여성(있다 79%, 없다 13%)과 거의 동일한 수치로,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낙태죄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낙태 금지를 강화해야 하는지, 필요한 경우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남성 응답자의 79%가 “허용해야 한다”고 답해, 오히려 여성(75%)보다 낙태죄 폐지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낙태를 일종의 살인으로 본다”는 응답자도 여성은 48%인 반면, 남성은 43%로 더 적었다. 

리얼미터 또한 지난해 4월 낙태죄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바 있다. 낙태죄를 폐지할 것인지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남성 응답자(248명)는 각각 유지 37.5%, 폐지 52.3%로 의견이 나뉘었다. 여성(252명)이 유지 23.4%, 폐지 64.3%로 나뉜 것에 비해서는 유지 의견의 비중이 높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도 낙태죄 폐지가 “주류의 시각”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시민건강연구소는 10일 페이스북을 통해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남성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면서, 여지껏 그 의견수렴과 자료조사도 안하고 뭘 한건가”라고 김 의원을 비판했다. 연구소는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대표하고 싶다면 노력을 했어야 한다”며 “권력과 책임있는 자들의 유체이탈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정치세력이 가만 앉아서 자료를 내놓아라, 조사를 더해봐라 하는 것도 이제 지겹다”고 지적했다. 

 

리얼미터가 지난해 4월 발표한 낙태죄 폐지 관련 여론조사 결과. 자료=리얼미터
리얼미터가 지난해 4월 발표한 낙태죄 폐지 관련 여론조사 결과. 자료=리얼미터

◇ 김남국이 ‘여성혐오’ 비판에 억울한 이유

물론 김 의원 입장에서도 억울한 점은 있다. 당시 공청회에서 김 의원의 전후 발언을 살펴보면, “여성을 짓밟는 망언”이라는 비난은 지나치기 때문이다. 

실제 공청회에서 김 의원은 “당장 법 개정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달라지는 건 2030 여성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의견이 존중받아야 한다며 여성들의 인식에 대해 먼저 질문했다. 남성들의 인식을 질문하기 전에도 “이 문제는 남성이 함께 결정을 해야 될 문제이고, 남성도 여기에 대해서 심각한 책임을 느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전제했다. 

또한 질문 뒤에는 “낙태는 태아의 생존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한다고 배웠는데, 최근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생존권이 침해된다는 문제제기가 있다”며 사회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김 의원이 구체적인 설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낙태죄 이슈에 대해 20~30대 남성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나가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김 의원이 여성정책을 도외시하다가 갑자기 공청회에서 ‘페미니스트 의원’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나선 것도 아니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김 의원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등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법안에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가장 최근에는 가정폭력피해자가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해 본인 및 그 직계혈족 정보가 있는 가족관계 기록사항 또는 증명서의 열람·교부 제한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공동 발의하기도 했다.

 

사진=시민건강연구소 페이스북 갈무리
사진=시민건강연구소 페이스북 갈무리

 

◇ 정의당이 김남국 발언을 비판한 이유

그렇다면 정의당은 왜 여성정책에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여온 김 의원이 남성의 낙태죄 인식을 질문한 것에 대해 이처럼 격분한 것일까? 이는 김 의원도 언급한 대로 여성이 낙태 문제의 핵심적인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낙태 문제의 책임을 홀로 짊어지고 ‘독박’ 처벌을 받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형법 269조는 낙태에 따른 처벌 대상을 ‘부녀(婦女)’와 ‘부녀’의 촉탁·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자(의료인)로 규정하고 있다. 남성은 애초에 낙태죄 적용 대상이 아닌 셈이다. 물론 남성도 낙태를 방조하거나 교사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명시적으로 낙태에 동의했음을 입증하지 않으면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성은 중절수술 동의서 보호자란에 서명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여성을 협박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제 2012년 여성 A씨가 남자친구 B씨와 낙태에 동의한다는 각서까지 작성한 후 수술을 받았지만, 이후 B씨에 의해 낙태죄로 고소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검찰은 B씨가 결혼자금 문제로 A씨의 낙태 사실을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B씨가 아닌 A씨의 아버지가 보호자 동의란에 서명한 것이 문제였다. A씨는 B씨의 폭행을 피해 집을 나오느라 보호자 서명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여성은 합법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하고 싶어도 모자보건법 14조에 따라 배우자인 남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낙태에 있어서 남성은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낙태죄에 대한 남성의 의견도 알고 싶다”라는 발언은 생뚱맞게 들릴 수밖에 없다. 낙태죄에 대한 책임도 없고 법 개정에 따라 영향도 받지 않는 집단의 의견이 중요하게 다뤄질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 12일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낙태죄를 완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의 발의자 명단에는 여성의원들만 이름을 올렸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 12일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낙태죄를 완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의 발의자 명단에는 여성의원들만 이름을 올렸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 낙태죄 폐지법은 여성 전유물? 국회의 ‘내로남불’

발언의 맥락을 살펴보면 김 의원의 질문을 ‘여성혐오’로 치부하는 것은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김 의원이 질문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낙태죄 폐지 논의의 핵심에서 엇나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김 의원은 ‘남성의 책임’을 강조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20~30대 남성 주류의 시각을 조사하는 것이 ‘책임지는 자세’라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낙태 이슈에 대해 남성들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김 의원의 질문도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되지만, 맥락 없는 질문은 결국 파열음을 내며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김 의원의 질문이 낙태죄 폐지에 대한 “20~30대 남성 주류의 시각”이 아니라 21대 국회 남성의원 주류의 시각에 대한 것이었다면 좀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했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남성은 이미 낙태죄에 대해 여성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적어도 의견의 일치는 이루고 있는 셈이다. 

국회는 어떨까? <뉴스로드> 분석 결과, 더불어민주당의 권인숙 의원이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11명의 의원 중 남성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같은 내용의 법안에도 10명의 발의자 중 배진교 의원만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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