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과의 직접소통을 위해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게시판을 연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그동안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입법·행정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한 문제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기됐고,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에는 청와대 및 관계부처가 직접 나서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뉴스로드>는 지난 3년간 20만 이상의 추천을 받은 여러 청원들에 대한 정부의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검증해봤다.

◇ 2018년 제주 예멘 청원 "난민법을 폐지하라"

지난달 28일 법무부가 난민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 법안에 대해서는 인권단체에서 비판을 담은 몇 건의 성명을 냈을 뿐, 언론의 조명도 사회적 반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생각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정부가 지난 2018년 제주 난민사태와 관련해 제기된 국민청원에 대한 2년 7개월만의 대답이 바로 이 법안이기 때문이다.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피신한 예멘 난민의 수가 2018년 500여명을 넘어서면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자, 같은 해 6월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불법체류와 허위 난민신청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며, 자국민의 안전을 먼저 챙기고 난민 관련 제도를 폐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제적인 인권 기준과 지역민의 불안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던 정부는 당시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난민법을 개정해 심사를 강화하고 강제송환·추방 조항을 명문화하며 ▲난민 심사 인력을 확충해 느린 심사 속도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는 청원인이 요구한 난민법 폐지나 난민협약 탈퇴는 외교적 고립을 이유로 불가하다고 선을 그었지만, 결국 난민 수용에 비판적인 여론의 손을 들어주기로 선택한 셈이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 난민법 개정안, 청원 요구 대부분 반영

그렇다면 정부는 제주 난민사태 청원에 대한 약속을 얼마나 이행했을까? 우선 난민법 개정의 경우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난민법 개정안은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으며, 21대 국회에서는 지난달 1일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난민 면접과정의 녹음·녹화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을 뿐이다.

그리고 국민청원이 제기된 지 2년 6개월이 지난 지난달 28일, 법무부는 난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개정안은 ▲난민 심사 전문 거점기관 신설 ▲중대한 사정변경 없는 재신청 제한 ▲명백한 이유 없는 신청에 대한 신속 처리 ▲허위 난민신청 브로커 처벌 강화 ▲신청자의 본국 방문 시 심사 신속 종료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와 함께 ▲난민신청자에 대한 절차적 권리보장 강화 ▲난민인정자 사회적응 지원 강화 등 난민 처우를 개선하는 내용 또한 담아 균형을 맞췄다.

청원의 제목은 ‘난민법 폐지’였지만 주된 요청은 불법체류 및 허위 신청 사례를 방지해달라는 것이었던 만큼, 개정안에는 청원인의 요구사항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법무부가 공개한 개정안의 내용이 국제사회의 인권기준에 부합하느냐다. 

 

법무부가 지난해 12월 28일 입법예고한 난민법 개정안의 내용 중 일부. 자료=법무부
법무부가 지난해 12월 28일 입법예고한 난민법 개정안의 내용 중 일부. 자료=법무부

◇ 인권단체, 난민법 개정안은 ‘난민 혐오’

인권단체들은 난민법 개정안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난민인권네트워크는 법무부가 난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지난달 28일 성명을 내고 “법무부는 난민혐오에 기반한 반인권적 난민법 개정법률안의 밀행적 입법시도를 즉시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이 지적하는 개정안의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심사 부적격 결정제도’와 ‘명백히 이유 없는 신청’ 등 두 가지다. 심사 부적격 결정제도는 기존에 신청이 기각된 난민이 중대한 사정 변경 없이 재신청한 경우, 면접을 생략한 채 신청서만으로 부적격 여부를 결정한 뒤 이의신청을 제한하는 제도다. 

하지만 애초에 난민 인정률이 0.4%에 불과한 한국에서 외부 도움 없이 난민이 1차 심사를 통과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난민인권네트워크는 “난민 소송은 대부분 본인소송으로 진행되는 데, 국가정황정보들을 변호사 없이 번역·정리·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법정에서 판사가 선의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부 기각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난민이 스스로 난민임을 입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지, 재신청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우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체류 연장이나 경제적 이유, 사인 간의 분쟁 등을 사유로 한 난민 신청을 ‘명백히 이유 없는 신청’으로 분류해 신속하게 걸러내겠다는 내용도 문제다. 난민이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추방되지 않기 위해 체류 연장을 시도하거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개정안에는 난민신청자에게 통역을 제공하는 등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심사 기간이 연장될 경우의 생계 지원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실제 난민신청자가 1차 심사 결과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규정(6개월)보다 긴 10.6개월이다. 반면, 난민법에 따른 신청자에 대한 생계 지원은 6개월까지만 제공되는데, 4.6개월 동안은 체류 기간을 연장한 뒤 취업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체류 연장’과 ‘경제적 이유’가 부적격 사유로 분류된다면, 난민신청자가 난민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한국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난민인권네트워크는 “(개정안의) 핵심은 대부분의 난민신청자를 남용적인 신청자로 낙인찍고 거부해온 기존의 행정관행에 법적근거를 마련하고 더 신속히 난민들을 추방하겠다는 것”이라며 “그나마 존재하던 난민인정심사 제도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15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법무부 난민면접조작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 권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난민인권네트워크 페이스북
난민인권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15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법무부 난민면접조작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 권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난민인권네트워크 페이스북

◇ '정책'과 '입법'이 멈춘 동안, '인식'은 변했다

난민 심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약속은 어떨까?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청구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난민 심사에 투입된 공무원은 65명으로 2016년 32명 대비 2배가량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현재 밀려있는 난민신청자를 처리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난민 심사 대기자는 1만7201명, 이의신청 대기자는 4615명으로 총 2만1816명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공무원 1명당 약 336명의 심사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심사가 빠르게 진행되기는 불가능하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속심사제도’가 남용돼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경우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대다수의 난민신청이 접수되는 A사무소의 경우 2016년 기준 5010건의 심사 중 무려 3436건(68.6%)을 ‘신속심사’로 분류할 정도였다. 

게다가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법무부는 난민전담공무원 1인당 월 15~25건, 신속심사 담당공무원은 월 40~44건을 처리하라고 지시한 뒤, 목표에 미달하면 경위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인권위가 이런 내용을 지적하며 난민 심사의 공정성 제고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것이 지난해 10월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심사 인력 확충도 절차 개선도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난민과 관련해 정책과 입법이 멈춰선 사이, 우리 사회의 인식은 오히려 정부와 국회를 추월해 앞서나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가 지난달 성인남녀 1016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응답이 33%로 2018년 예멘 사태 당시(24%)보다 9%p 늘어났다. 물론 반대 응답이 53%로 여전히 다수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2018년(56%)에 비하면 줄어들었다.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