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이 눈에 덮여있는 모습. 사진=유럽우주기구(European Space Agency)
15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이 눈에 덮여있는 모습. 사진=유럽우주기구(European Space Agency)

미국 텍사스주에서 발생한 정전 사태의 원인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기상이변에 취약한 재생에너지 때문에 전력수급에 차질을 빚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텍사스주의 취약한 전력인프라가 원인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텍사스주에서는 지난 15일(현지시간)부터 찾아온 급격한 한파로 인해 발전소 장비들이 얼어붙으면서 전력공급이 줄어들었고, 결국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텍사스주는 비교적 따뜻한 기후 때문에 난방시설이 부족했던 만큼 각종 피해가 속출했고, 심지어 11살 아들을 추위에 잃은 한 여성이 텍사스 전력회사 엔터지와 텍사스전기신뢰협의회(ERCOT)를 상대로 1억 달러(약 1109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 텍사스 주지사, "풍력·태양광이 정전 원인"

미국 내에서는 이번 정전 사태의 원인이 재생에너지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레고리 애벗 텍사스주 주지사(공화당)는 16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그린 뉴딜’이 미국에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인지 보여준다”며 “전력생산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풍력·태양광 발전이 중단되면서, 텍사스주 전체가 이 같은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사태는 텍사스주뿐만 아니라 다른 주에도 화석연료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실제 ERCOT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텍사스주 전력생산의 25%(풍력 23%, 태양광 2%)를 재생에너지가 담당하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다른 발전방식에 비해 날씨의 변화에 취약한 만큼, 재생에너지에 과도한 비중을 둔 것이 대규모 정전사태로 이어졌다는 것. 특히 비중이 높은 풍력발전의 경우 한파로 인해 터빈이 얼어붙으면서 제때 전력을 공급하지 못했다.

 

그레고리 애벗 텍사스 주지사. 사진=폭스뉴스 방송화면 갈무리
그레고리 애벗 텍사스 주지사. 사진=폭스뉴스 방송화면 갈무리

◇ 천연가스·석탄발전도 '먹통'

반면 이번 정전사태가 풍력발전의 본질적인 취약성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반박도 나온다. 애벗 주지사가 옹호하는 화석연료 발전도 풍력과 마찬가지로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텍사스주 내 전력공급업체를 관리하는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는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천연가스·석탄·원자력 발전이 중단된 것이 정전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밝혔다. ERCOT에 따르면 정전사태로 발생한 45기가와트의 전력손실 중 풍력발전으로 인한 손실은 15기가와트(33%)였던 반면, 천연가스와 석탄발전으로 인한 손실은 30기가와트(66%)였다. 

한파는 풍력 터빈뿐만 아니라 천연가스 파이프라인도 얼려버렸다.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물 공급 장치가 동결돼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체 전력 손실의 3분의 2 이상이 화석연료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은, 화석연료발전 또한 기상이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정전 사태 원인은 전력시장 '탈규제'?

현지 언론들은 이번 사태의 핵심은 텍사스주의 독특한 전력공급체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주들은 전력 수급이 불안정해지면 다른 주에서 전력을 끌어올 수 있도록 전력 공급망을 연결해놓고 있다. 하지만 텍사스주는 연방정부의 에너지 규제를 피하기 위해 독립 전력 공급망을 유지하고 있다. 위기 시 다른 주에서 도움을 받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엄청난 천연가스 및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텍사스주로서는 굳이 규제를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주와 전력 공급망을 연결하는 것 보다는, 독립된 공급망을 유지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한파로 가스공급관까지 얼어붙으면서 규제 회피를 위해 ‘꼼수’를 선택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됐다.

텍사스주 정부가 전력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22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주지사를 맡고 있었던 지난 1999년부터 시작된 전력시장의 탈규제화 정책이 이번 정전사태의 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시 “전력산업의 경쟁은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과 저렴한 요금을 제공함으로서 텍사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력시장 탈규제화의 종착점은 대규모 정전사태였다. 전력공급업체들이 주 정부의 규제 없이 수익 극대화에 주력하는 동안, 이번 한파와 같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투자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실제 텍사스주는 지난 2011년에도 이상 한파로 정전 사태가 발생하면서 연방정부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그 뒤에도 별다른 대비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자료=에너지경제연구원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 시나리오’에 따라 풍력·태양광이 보급된 경우(C2WS)와 그렇지 않은 경우(C1), 풍력·태양광과 함께 ESS를 도입한 경우(C3WS)의 필요 예비력을 비교한 표. 자료=에너지경제연구원

◇ 변동성 재생에너지, '만약의 사태' 대비 필요

물론 이번 정전 사태에서 재생에너지가 완전히 ‘무죄’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 태양광·풍력 등은 기후 변화에 민감한 변동성 재생에너지로 다른 발전방식에 비해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더욱 절실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지난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태양광과 풍력의 보급이 확대되면 화석연료 발전을 효과적으로 대체하지만, 높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으로 인해 전력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예비력의 양이 크게 증가한다”고 지적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 시나리오’대로 태양광과 풍력이 보급될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예비력 요구량이 약 3.9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상이변에 대비한 인프라 구축와 분산형전원(ESS, 연료전지)으로의 전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태양광과 풍력이 예정대로 보급되더라도 ESS를 도입하면 필요 예비력은 기존 대비 3.9배에서 1.6배 수준으로 감소한다.

실제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텍사스보다 날씨가 추운 북유럽 지역에서는 혹한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풍력발전단지에서 아무 문제없이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애초에 한파를 견딜 수 있도록 고려한 설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재생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텍사스주는 과도한 탈규제 정책으로 인해 전력공급자에게 '만약'을 대비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스스로 내려놓은 셈이다. 

휴스턴대학에서 에너지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에드 하이어스는 지난 19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서 “주 전력공급체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해 더 많은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더욱 무서운 것은 다른 주들이 텍사스를 보고 전력시장의 탈규제화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다는 점”이라며 “탈규제화를 추진 중인 정치인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들을 보고 생각을 바꾸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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