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청원, 위헌 판결 후에도 공전
'낙태죄 폐지' 청원, 위헌 판결 후에도 공전
  • 임해원 기자
  • 승인 2021.03.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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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과의 직접소통을 위해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게시판을 연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그동안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입법·행정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한 문제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기됐고,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에는 청와대 및 관계부처가 직접 나서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뉴스로드>는 지난 3년간 20만 이상의 추천을 받은 여러 청원들에 대한 정부의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검증해봤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2017년 11월 26일 낙태죄 폐지 및 임신 중절 약물 도입 청원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2017년 11월 26일 낙태죄 폐지 및 임신 중절 약물 도입 청원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도입’ 청원, 청와대 답변은?

2017년 9월 30일 청와대에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며 “낙태죄를 만들고 낙태약을 불법으로 규정짓는 것은 이 나라 여성들의 안전과 건강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낙태죄 관련 논점을 재검토하겠다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놨다. 아직 낙태죄 폐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나오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공식 답변에 나선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청원을 계기로 임신중절 법제도 현황과 논점에 대해 정부가 다시 살펴보게 됐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조 전 수석은 “현재 헌재에서 다시 한 번 관련 낙태죄 위헌법률심판 사건이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공론의 장이 마련되고, 사회적·법적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라며 “실제 법 개정을 담당하는 입법부에서도 함께 고민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연유산 유도제(미프진) 도입 여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조 전 수석은 “당장 2010년 이후 실시되지 않은 임신중절 실태조사부터 2018년에 재개하기로 했다.”며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낙태죄 관련 제도 개선 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실제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8년 11월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부가 발의한 형법 개정안이 지난해 11월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정부가 발의한 형법 개정안은 임신 14주까지(사유가 인정될 경우 24주)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 "임신 14주까지 낙태 허용" 정부안에 여성·종교계 모두 반발

그렇다면 청원 이후 3년 6개월이 지난 지금 낙태죄 관련 제도개선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법적 공백 상태에서 낙태에 대한 처벌은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청원이 올라온지 약 1년7개월 뒤인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269조 1항, 270조 1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기 때문. 다만, 헌재는 지난해 12월 31일까지 해당 조항의 효력을 한시적으로 인정하면서, 법률 공백에 따른 혼란이 없도록 기간 내에 법을 개정하라고 주문했다. 

정부는 헌재 판결 이후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낙태 관련 조항을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실제 지난해 11월에는 정부안 두 건이 모두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문제는 정부안이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안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성폭행에 의한 임신, 임산부의 건강 위험, 사회·경제적 사유 등에 따라 24주까지 허용 기간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낙태죄는 존치하돼 허용 요건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온 여성계는 정부안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모임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성명을 통해 “여성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고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사회적 권리 제반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며 “‘언제부터,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가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어떤 시기에, 무엇을 보장할 것이냐’가 돼야 한다”고 정부안을 비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정부안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31일 “낙태한 여성에 대한 처벌을 존치하면서 일부 처벌이 면제되는 예외를 허용하도록 규정한 정부개정안은 여성의 자기결정권, 재생산권 및 건강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으며, 유엔 등 국제기구의 낙태 비범죄화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라며 “낙태를 한 여성에 대한 처벌규정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반대편에서는 정부안보다 임신중절 허용 기간을 단축한 법안도 발의됐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1월 태아의 심장박동이 확인되는 6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사유에 따라 10주까지 허용기간을 확대하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해, 종교계 및 보수성향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여당이 낙태죄 관련 법 개정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며 신속한 심사를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개정안을 둘러싸고 이견이 엇갈리다보니 국회도 낙태죄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 법률 공백이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법사위에서는 관련 심의가 전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정부안이 통과되더라도 낙태죄 폐지론자와 존치론자 모두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한 셈이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8일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 관련 법 개정 및 제도 개선, 유산유도제 도입 등을 요구했다. 사진=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8일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 관련 법 개정 및 제도 개선, 유산유도제 도입 등을 요구했다. 사진=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 낙태죄 관련 법 개정 논의 중단, 유산유도제 도입도 지연

유산유도제(미프진) 도입 논의도 법안 심사가 지연되면서 미궁에 빠졌다. 정부는 2017년 청원 답변 당시에는 유산유도제 도입 요청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관련 내용을 포함시켰다. 기존에는 ‘인공임신중절’의 방법으로 ‘수술’만 포함됐지만, 개정안에는 ‘약물’을 추가한 것. 법안이 통과되면 현재 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유산유도제가 합법적으로 보급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게 된다.

물론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당장 유산유도제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 의약품이 국내에 도입되려면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검사를 거쳐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통 자체가 불법인 상황에서 식약처에 유산유도제의 수입 허가를 신청할 제약사는 없다. 현대약품이 최근 영국 제약사 라인파마와 경구용 유산유도제 ‘미프진’의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지만, 허가와 관련해서는 신청서를 접수하지 않고 식약처와 협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유산유도제 도입 논의가 지연되다보니 국회뿐만 아니라 관계부처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고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등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주무부처가 여전히 매우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 머물러있는 점은 개탄스럽다”며 “임신중지 서비스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제한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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