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과의 직접소통을 위해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게시판을 연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그동안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입법·행정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한 문제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기됐고,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에는 청와대 및 관계부처가 직접 나서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뉴스로드>는 지난 3년간 20만 이상의 추천을 받은 여러 청원들에 대한 정부의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검증해봤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 지난 2015년 당시 21세였던 A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 회식에 참여했다가 매니저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가해자는 이듬해 형사재판에서 준강간치상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A씨는 2017년 정신적·신체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보호되는 형사재판과 달리 민사재판 판결문에는 A씨의 휴대전화 번호, 집주소 등 신상정보가 그대로 노출됐고, 아무런 조치 없이 가해자에게 전달됐다. A씨는 이후 이름을 바꾸고 전화번호도 여러 차례 바꿨으나, 여전히 가해자가 보복을 하러 자신을 찾아올 수 있다는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로 지난 2018년 피해자 A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저는 2019년 8월 5일 강간범에게 보복살해 당할 예정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화제가 된 바 있다. 글을 올리기 전 A씨는 먼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판결문에 피해자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달라는 청원을 올렸지만 참여 인원이 3만명에서 멈춰 청와대 답변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 이후 A씨는 다시 청원을 올린 뒤 앞으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지지를 호소했고, 누리꾼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청원 참여 인원이 25만명을 넘게 됐다.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재임 중이던 김영현 변호사는 해당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형사소송과 달리 민사소송은 개인의 권리에 관한 다툼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송 당사자의 특정이 필요하다”며 “판결에 따라 강제집행 등의 조치가 뒤따르기 때문에 판결문에 반드시 당사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해야 한다”고 판결문에 피해자를 특정해야 하는 법률적 필요성을 언급했다. 

김 전 비서관은 이어 “법무부도 가해자에게는 익명 판결문을 제공하는 등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논의하고 있다”며 “좀 더 정교한 입법논의가 필요합니다. 법원에서도 기존 제도에 보완할 점이 있는지 면밀하게 살펴볼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변을 마무리했다. 

 

2018년 10월 SBS에서 성범죄 피해자 인적사항을 판결문에 기재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청원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SBS 방송화면 갈무리
2018년 10월 성범죄 피해자 인적사항을 판결문에 기재하지 말아달라고 청와대에 요청한 청원인이 SBS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SBS 방송화면 갈무리

◇ 피해자 개인정보 보호, 국회의 노력은?

A씨가 청원을 올린 지 약 3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해결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청원글에도 언급됐지만,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현행 민사소송법에는 법원이 소송서류를 송달할 때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가릴 수 있다는 근거가 없어 2차 가해의 위험을 방지하기 어려웠다. 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소송서류 송달 및 소송기록 열람·복사 시 법원이 직권 또는 신청에 따라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가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한계가 뚜렷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검토보고서에는 ▲소송기록에서 인적사항을 가려도 판결문에는 기재되기 때문에 판결 전까지만 피해자 보호가 가능하다는 점 ▲현행 전자소송 시스템에서 개인정보만을 따로 삭제하기 곤란해 시스템 전체를 정비하지 않으면 보호조치가 무의미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개정 실익이 불분명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판결문에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않으려면 행정자치부·금융기관 등을 대상으로 한 통합적인 개선이 필요해 고려할 부분이 많다는 점도 언급됐다. 

결국 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20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으며, 박 의원은 21대 국회에서 같은 법안을 다시 한 번 발의한 상태다. 

21대 국회 들어서는 A씨의 요구대로 판결문에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지난해 12월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은 범죄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의 경우 법원 직권 또는 당사자 요청에 따라 판결서 정본에 당사자의 개인정보를 전부 또는 일부 가리도록 했다. 차이는 김 의원안의 경우 판결서 작성 시, 서 의원안은 판결서 송달 시 개인정보를 가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21대 국회에 발의된 피해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민사소송법 개정안.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21대 국회에 발의된 피해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민사소송법 개정안. 자료=국회의안정보시스템

하지만 이 개정안들도 피해자를 완벽하게 보호하기는 어렵다. 전자소송 시스템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데다, 민사소송 판결문에 개인정보를 가린다고 하더라도 추후 강제집행 과정에서 집행문에 당사자의 정보가 기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사위는 검토보고서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집행문에 원고의 개인정보가 기재되지 않는 경우에도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도록 해당 개인정보를 관리하는 외부 공공기관과 해당 정보를 공유하거나, 집행을 위해 해당 정보가 필요한 자에게 해당 정보를 표시한 별도의 확인서를 발급하는 등의 방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법안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민사소송법 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청원인 A씨가 우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A씨는 당시 “현행법상 민사소송을 제기해서 승소 판결문을 받고 소송비용액확정 결정문을 받는 단계까지는 민사소송법의 영향을 받지만, 그 이후에 강제집행 단계에서는 민사집행법의 영향을 받는다”며 “민사소송 과정뿐만 아니라 강제집행(민사집행) 단계에서도 성폭력 등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보호하려면 민사소송법뿐만 아니라 민사집행법도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대 국회뿐만 아니라 21대 국회에 들어서도 범죄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민사집행법 개정안은 아직 발의되지 않고 있다. 20대 국회와 달리 21대 국회는 성범죄 피해자 보호를 요청하는 목소리에 응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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