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로이트 글로벌이 지난 16일 발표한 '우먼 인 더 보드룸' 보고서에 나온 한국 기업의 여성 이사 현황. 자료=딜로이트 글로벌
딜로이트 글로벌이 지난 16일 발표한 '우먼 인 더 보드룸' 보고서에 나온 한국 기업의 여성 이사 현황. 자료=딜로이트 글로벌

[뉴스로드] 한국의 성평등 수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한국처럼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도 드물다는 자화자찬이 나오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 비해 성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 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세계 11위?

실제 과거에도 성평등의 정도를 측정하는 각종 지수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지난해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HDR) 2020’에 따르면, 한국의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 GII)는 0.064(2019년 기준)을 기록했다. GII는 0에 가까울수록 성평등을,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을 의미하는데 0.065는 전 세계 189개국 중 1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유럽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순위인 ‘GII 11위’에 올랐다는 소식은, 심각한 성별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성평등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반박하기 위한 ‘신뢰성’ 있는 근거로 활용됐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GII 11위'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순위다. 그리고 UNDP가 GII를 산출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이러한 여성들의 의구심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 GII는 모성 사망비, 청소년 출산율, 여성의원 비율, 중등학교 이상 교육 비율, 경제활동 참가율 등의 지표로 구성된다.

한국은 의료인프라가 잘 갖춰져있어 모성 사망비가 낮은 데다, 보수적인 성 문화로 인해 청소년 출산율도 저조하다. 게다가 교육수준도 높아 중등교육 이상인 여성 비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남녀 간의 격차보다는 여성의 절대적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 덕분에 GII 11위라는 순위가 가능했다.

반면, 여성과 남성의 격차를 측정하는 지표에서 한국의 순위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실제 GII에서 여성의원비율만 따로 순위를 매겨보면 한국(16.7%)의 위치는 129위까지 떨어진다.  보수적인 정치문화로 인해 여성의 정계 진출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또한 절반을 겨우 넘는 52.9%로 94위에 그쳤다.

◇ 딜로이트 글로벌 보고서 "한국기업 여성 이사 비율 4.2%"

물론 국가별로 실업율 등 경제적 조건이 다른 만큼 경제활동 참가율을 성평등을 측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 프랑스(50.8%)나 벨기에(48.6%)처럼 한국보다 GII 순위는 높으면서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더 낮은 국가도 있다. 성평등을 더욱 명확하기 보여주는 지표는 단순한 경제활동 참가율이 아닌, 여성이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보장되느냐다. 예를 들어, 여성 이사나 임원의 비중이 높다면 성 격차가 비교적 작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비중이 과도하게 낮다면 그 사회는 여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6일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딜로이트 글로벌이 발표한 ‘우먼 인 더 보드룸’(Women in the boardroom)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의 이사회에 등록된 여성 이사 비율은 4.2%에 불과했다. 이는 72개국 평균인 19.7%를 크게 밑도는 수준으로 뒤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국보다 여성 이사 비율이 낮은 국가는 카타르(1.2%), 사우디아라비아(1.7%), 쿠웨이트(4%) 등 중동권 국가 3개뿐이었다. 한국 기업에서 여성이 이사회 의장이나 최고 경영자(CEO)로 활동하는 비율도 각각 2.3%, 2.4%에 그쳤다.

임원 비율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자산총액 2조 이상의 상장법인 152개를 조사한 결과, 여성 등기임원을 1명 이상 선임한 기업은 85개(55.9%)였다. 3만2005명의 전체 임원 중 여성 임원(1668명) 비율은 5.2%에 불과했는데, 이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측정한 OECD 평균 여성 임원 비율 25.6%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 성 격차 줄수록 생산성↑, 성 격차 크면 투자기회↓

이처럼 우리 사회, 특히 기업 내 성 격차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문제는 성 격차를 좁히지 못하면 사회적 부작용은 물론 기업이 재무적인 타격을 입을 위험도 커진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주목받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투자의 핵심 기준에는 환경오염이나 지배구조의 투명성뿐만 아니라 성평등한 조직문화도 포함된다. 이제는 해외 투자기관이 탄소배출량이 많다거나 무기나 담배 제조에 관여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기업문화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도 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블룸버그는 매년 투자자들에게 참고자료로 제공할 목적으로 ‘성평등 지수(Gender Equality Index, GEI)’를 발표하고 있다. GEI에는 여성 임원 및 중간관리자 비율, 여성 승진 및 퇴사율, 육아휴직 기간 및 복직률, 조직 내 성폭력 대응 시스템, 경력단절 여성 복직 프로그램 등 다양한 평가 요소들이 포함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또한 지난해 2월 투자 대상 기업에게 여성 이사 비율을 30% 이상 높이라고 요구했다. 이미 해외 석탄발전 사업 투자 문제로 한국전력에 대한 투자를 철회한 적이 있는 만큼,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머지 않아 한국 기업의 성차별적 의사결정 구조를 이유로 투자를 철회할 가능성도 있다. 

꼭 ‘큰 손’들의 투자 철회가 아니더라도 기업 내 성 격차를 좁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성평등한 기업일수록 생산성이 높고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실제 모건스탠리캐피털인베스트먼트(MSCI)가 지난 2015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643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36.4%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지난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남성이 창업한 기업은 5년간 평균 66만2000달러를 벌어들였지만, 여성이 창업한 기업은 같은 기간 그보다 10%가량 많은 73만 달러의 수익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에서도 기업 내 의사결정 구조에 여성의 참여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 지난 2020년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이사회의 성별 구성에 관한 특례’가 새로 생겼는데, 이는 자산총액 2조원이 넘는 기업은 최소 1명 이사의 여성 이사를 두도록 한 규정이다. 기업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남성으로만 구성되지 않도록 한 것. 

다만 의무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제재규정이 없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올해 8월 5일부터 시행되는 이사회 여성할당제가 국내 기업의 조직 문화를 바꾸고 실질적인 성평등을 이루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뉴스로드 임해원 기자 theredpil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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