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부산까지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부분

길의 시작은 울산 울기등대 밑 대왕암에서다. 고래턱뼈 조각상을 번쩍이게 할 것만 같은 아침햇살을 만난 뒤 장생포를 돌아보지만, 이제 고래의 신화 따위는 기껏 고래고깃집 식탁 위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유성문
길의 시작은 울산 울기등대 밑 대왕암에서다. 고래턱뼈 조각상을 번쩍이게 할 것만 같은 아침햇살을 만난 뒤 장생포를 돌아보지만, 이제 고래의 신화 따위는 기껏 고래고깃집 식탁 위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유성문

태고에 고래가 있었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사람살이의 가장 오래된 기록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제법 사실적으로 ‘경연(鯨宴)’이 묘사되어 있다. 물을 뿜어대는 고래에서부터 새끼를 등에 업은 고래, 작살을 맞은 고래, 그물에 걸린 고래, 뿐만 아니라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배와 고래의 해체와 분배에 관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고래와, 고래에 얽힌 사람의 삶에 관한 기록은 그토록 낱낱이 남아있다.

내력은 그토록 길건만 울산 앞바다가, 장생포가 근대적인 의미의 고래잡이 터전으로 부상한 것은 1891년부터였다.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인 니콜라이 2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떼를 보고 무릎을 쳤다.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태평양어업주식회사를 세우고 한국 정부로부터 포경권을 얻어 본격적인 고래사냥에 나섰다. 그때 포획한 고래의 해체장소로 쓰이던 장생포는 그렇게 포경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상업포경을 금지할 때까지 장생포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지만, 동해바다의 고래들은 처참한 수난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계속된 남획으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던 참고래도, 유달리 모성본능이 강하다는 혹등고래도, 영리하지만 사납기 그지없다는 귀신고래도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울산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간절곶에 다다르면 바다로 열린 언덕 위에 빈 벤치 하나 놓여있다. ⓒ유성문
울산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간절곶에 다다르면 바다로 열린 언덕 위에 빈 벤치 하나 놓여있다. ⓒ유성문

그토록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장생포 앞바다에서 잠시 무참하다. 이미 장생포에 잡을 수 있는 고래는 없고, 설령 있다 해도 고래를 잡을 만한 힘이 없으니. 장생포 역시 모든 희망도 꿈도 잃어버린 늙은 고래처럼 그렇게 웅크리고만 있을 뿐이고. 쓸쓸한 선창가, 이미 폐선이 되어버린 낡은 포경선 두어 척, 오래된 고래고깃집들, 비릿한 바닷내음, 그것이 장생포의 전부란 말인가.

2005년 울산에서 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린 것을 계기로 장생포는 잠시 새로운 희망을 갖기도 했다. 고래박물관 개관을 필두로 고래연구센터를 세우고, 고래관광선을 띄우고, 고래축제를 확대하여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고래도시’로 재부상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아예 일본처럼 과학적 목적의 포경이나 솎아내기 포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포경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장생포는 알고 있었을까.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는 것을. 시인의 말마따나 차라리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늙은 포수처럼 기다림마저 놓쳐버린 이라면 장생포의 어둑한 선착장에서 자꾸만 신화처럼 떠오르는 흰 고래의 환영만을 망연자실 바라보게 되리라.

간절곶에서 청사포까지는 갈매기의 흰 날갯짓을 줄기차게 따라가는 길이다. ⓒ유성문
간절곶에서 청사포까지는 갈매기의 흰 날갯짓을 줄기차게 따라가는 길이다. ⓒ유성문

간절곶에서 청사포까지는 갈매기의 흰 날갯짓을 줄기차게 따라가는 길이다. 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가는 그 길은 깊고 푸른 관능으로 가득하다. 간절곶 등대와 서생포 왜성을 지나서, 기장 앞바다마저 지나서 마침내 청사포에 이르면 왜 길이 그토록 푸르렀는가를, 그 푸르름이 왜 그렇게 관능적이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옛날 이곳 청사포에는 금슬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면 아내는 어김없이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서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이별과 해후가 반복될수록 둘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간 남편은 풍랑을 만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몇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서서히 시들어가는 아내, 바다 속에서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남편. 그 간절함을 차마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바다의 신은 푸른 뱀을 보내 아내를 인도한다. 그렇게 만난 부부는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몽환적인 사랑을 나눈다.

하릴없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의 푸른 기에 밀려 기장 앞바다마저 지나치면 이윽고 최백호의 ‘청사포’다. ⓒ유성문
하릴없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의 푸른 기에 밀려 기장 앞바다마저 지나치면 이윽고 최백호의 ‘청사포’다. ⓒ유성문

해운대를 지나서 꽃 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최백호 ‘청사포’ 중에서

한 세대 전만 해도 부산의 연인들은 바다를 보러 가자면 으레 청사포를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 달맞이고개에서 내려다보는 청사포 앞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은 바다인 줄 알았다. 오죽했겠는가. 그곳이 비록 푸른 모래 한 점 없는 작은 포구라 해도, 찰랑거리는 물결이 발등조차 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바닷가라 해도 이미 열정과 구애로 들뜬 연인들에게 그 바다는, 그 바다의 밤은 하염없이 깊고도 아득했으리라.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거리는데 순정의 첫 키스 열정의 그날 밤 수줍던 너의 모습 이제는 바람의 흔적마저 찾지 못할 청사포

낭만가객 최백호의 회상은 덧없이 이어지지만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에서 나는 추억으로 무너졌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흐르는 건 흐르도록 놓아둘 수밖에. 파랗게, 파랗게 흐르는 시간과 다시는 못 만날 빛과 바람까지 그렇게, 그렇게 보내줄 수밖에. 그렇지만 또 어쩌겠는가. 잠든 기억을 아프게 비집고 뒤척이며, 솟아오르는 푸른 비늘 하나는.

앙증맞게 파란 등대, 달맞이고개 위의 성냥갑 같은 집들, 조금은 때늦은 한 쌍의 연인들과 함께 거기 마냥 서성거릴 일이다. ⓒ유성문
앙증맞게 파란 등대, 달맞이고개 위의 성냥갑 같은 집들, 조금은 때늦은 한 쌍의 연인들과 함께 거기 마냥 서성거릴 일이다. ⓒ유성문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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